[내부자들, 낙태를 말하다] <1> 5년간 낙태 판결 80건 분석해보니
박모 씨(25)의 협박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겁에 질린 김모 씨(24·여)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은 한때 캠퍼스 커플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올해 초 두 사람 사이에 예상치 못한 아이가 생겼다. 김 씨는 “낙태하고 싶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절반씩 비용을 부담해 낙태 수술을 받았다. 이때만 해도 김 씨는 박 씨의 협박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이별했다. ‘전 남친’이 된 박 씨는 김 씨의 낙태 사실을 학교 친구들에게 말했다. 참다못한 김 씨는 지난달 박 씨를 찾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며 울먹였다. 그러자 박 씨는 “나야말로 낙태죄로 고소할 것”이라고 맞섰다. 결국 김 씨는 학기 중 휴학했다.
2012년 8월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합헌 결정을 내렸다. 본보는 헌재 결정 후 이달까지 5년간 전국 법원에서 이뤄진 낙태 관련 판결 80건을 모두 입수해 분석했다. 낙태죄는 낙태를 한 여성 본인(자기낙태죄), 수술 등의 방법으로 낙태를 도운 의료진(업무상 촉탁 낙태죄), 낙태에 대한 명시적 동의 의사를 밝힌 남성(낙태 방조) 등을 처벌한다. 낙태는 강간에 의한 임신인 것으로 수사기관에서 확인되거나 부모가 유전적 장애가 있는 때 등 예외적 경우에만 허용된다.
판결문에는 남자친구 또는 남편의 신고로 법의 심판대에 선 여성이 다수 등장했다. 이혼 소송이나 양육권 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거나 이별을 요구하는 여자친구를 붙잡으려는 남성들에게 낙태죄가 악용되고 있었다.
지난해 낙태죄로 40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은 최모 씨(29·여). 그는 남편(32)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이혼을 결심한 뒤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 위자료 액수를 두고 최 씨와 갈등을 빚던 남편은 최 씨와 낙태 수술을 해준 산부인과 의사를 경찰에 고소했다.
법원 관계자는 “낙태 사실은 당사자인 여성과 수술한 의사, 상대 남성 등 극소수만 알고 있어 셋 중 한 명이 고소하지 않는 한 드러나기 힘들다. 그래서 고소인은 대부분 상대 남성 또는 남성 측 가족”이라고 말했다. 낙태 사실이 발각되면 여성과 의사는 처벌을 받지만 남성은 수술에 동의했다는 명시적 증거가 없으면 처벌을 면한다.
남성 동의를 받지 않거나 병원 기록에 남지 않게 수술을 받으려는 여성들은 어쩔 수 없이 ‘고위험 고비용’의 수술대를 찾는다. ‘낙태 브로커’를 통해 음성적으로 병원을 소개받아야 한다. 수술비뿐 아니라 100만 원 안팎의 추가 비용이 든다. 낙태 브로커로 일했던 대학생 김모 씨(28)는 “인터넷에 ‘낙태 가능 병원 상담 문의’ 등의 글을 올리면 연락이 쏟아진다. 산부인과에 무작위로 전화를 돌려 예약해 주는 대가로 건당 10만∼30만 원씩 받았다”고 털어놨다.
○ ‘식물형법’이 된 낙태죄
5년간 80건의 낙태 판결에서 실형이 선고된 사례는 단 1건이다. 낙태 시술을 받던 여성을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집행유예 형을 받은 조산사가 20대 여성을 또다시 낙태한 혐의로 2012년 부산고법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은 사례가 유일하다. 나머지 피고인은 선고유예(51.3%)와 집행유예(36.3%) 등의 처분을 받았다.
27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연간 약 17만 건의 낙태수술이 이뤄진다. 기소는 연간 10여 건에 불과하다. 사실상 낙태죄가 사문화돼 ‘식물형법’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피고인 80명 중 56명(70%)은 의사, 간호사 등 의료진이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서 하루 평균 낙태수술 건수는 3000여 건으로 추정된다.
29년 경력의 산부인과 의사 성모 씨(55)는 “낙태하러 온 여성들은 아는 사람 눈에 띄지 않으려고 대부분 거주지에서 1, 2시간 정도 떨어진 병원으로 찾아온다. 여성들이 애절하게 눈물을 흘리며 낙태를 부탁하면 불법이라고 그대로 돌려보내기 어려워 괴롭다”고 말했다.
정현미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금의 현실을 그대로 두고 낙태죄를 손보지 않는다면 여성과 산부인과 의사를 잠재적인 범죄자로 내모는 셈이다. 낙태죄는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입법 취지에서 벗어나 어른들이 서로의 약점을 공격하는 수단이 됐다”고 지적했다.
이지훈 easyhoon@donga.com·김예윤·최지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