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진균 정치부 차장
“여야가 힘을 모아 예산을 꼼꼼히 검토해 불필요한 부분을 상당 부분 삭감했습니다. 당초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에서 ○○○억 원 줄이면서도 민생 예산은 ○○○억 원 늘렸습니다.”
여야 의원들이 내세우는 이 같은 ‘알뜰살림’엔 숨겨진 비밀이 있다.
정부가 작성한 예산안에는 사업별 소요 금액이 100만 원 단위까지 빼곡히 적혀 있다. 이 금액을 모두 합친 2018년도 예산의 지출 규모는 429조 원이 넘는다. 이 안에는 어느 정도 삭감을 예상하고 책정해 놓은 숨겨진 돈이 포함돼 있다. 국회가 예산 심의 과정에서 부풀린 예산을 깎은 뒤 그만큼의 예산을 의원들이 원하는 사업, 흔히 말하는 쪽지 예산으로 돌릴 수 있게 만들어 둔 일종의 장치다. 정치권에선 이를 ‘쿠션을 준다’고 한다. 여유 공간을 마련한다는 뜻이다.
여러 방법이 있지만 대표적이고 굵직한 것이 국채 이자율 조정이다.
정부는 해마다 외국환평형기금채권을 제외하고도 300조 원(신규와 차환 포함)이 넘는 국채를 발행한다. 정부가 설정한 내년도 국채 이자율(계획 금리)을 0.1%포인트만 낮춰도 수천억 원의 예산을 감액할 수 있다. 예산 결산 자료에 따르면 국회는 2016년도 예산에서 당초 3.5%였던 이자율을 2.8%로 0.7%포인트 내리는 방식으로 1조6834억 원을, 지난해에도 같은 방식으로 6912억 원을 감액했다. 이 돈 대부분은 각 당 또는 의원들이 원하는 사업의 재원으로 사용됐다.
국회와 정부는 “세계적인 저금리 기조를 고려해 이자율을 낮춘 것으로 문제가 없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국회가 국채 이자율 조정을 통해 많게는 조 단위의 예산을 감액한 뒤 이를 다른 사업에 쓰는 것은 저금리 기조가 본격화된 2012년 이후 이어져 온 한국만의 관행이다.
그러나 올해는 과거와 달리 국채 이자율에 더욱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국채 이자는 국가부도 사태가 나지 않는 이상 무조건 지급해야 한다. 예상 밖으로 금리가 오르면 이자를 갚기 위해 국채를 추가로 발행해야 한다. 특히 지금은 미국 금리 인상이 예상되는, 경제 여건이 무척 불확실한 비상 상황이다.
재원과 기회의 합리적 배분을 위해 예산안에 대한 정치의 판단과 개입은 필요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예정된 삭감 과정을 거친 뒤에 “국회의 노력으로 불필요한 부분을 줄였다”는 식의 자랑은 안 했으면 한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길진균 정치부 차장 l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