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자들, 낙태를 말하다] <4>출산 택한 비혼모의 ‘증언대’
헌법재판소가 2012년 “낙태죄 합헌” 결정을 하며 제시한 근거입니다. 헌재의 결정대로 낙태 대신 출산을 선택한 여성들은 당시 판단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동아일보 취재팀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키우는 비혼모(非婚母) 3명을 만났습니다. 세 명 모두 “아이 낳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태아의 생명이 고귀한 만큼 태어난 이후의 생명도, 아이를 낳은 엄마의 인생도 중요한 것 아니냐”고 하소연합니다. 이들의 말처럼 아빠 없는 아이들과 비혼모의 척박한 삶을 외면한 채 생명의 고귀함만 강조하는 건 설득력이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내년 초 헌재는 6년 만에 낙태죄 위헌 여부를 다시 논의할 예정입니다. 비혼모 3명이 가상의 헌재 증언대에 섰습니다. 하루하루 맞닥뜨린 현실에서 우러난 이들의 증언을 함께 들어보시죠.
○“고귀하고 존엄한 생명권을 침해할 수 없다.”
2014년 12월, 눈에 보이지 않는 심장소리를 들었습니다. ‘쿵, 쿵.’ 제발 임신이 아니길 기도하며 병원에 들어갔던 저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생각했습니다. ‘무조건 낳아야겠다.’ 남자친구와는 아이는커녕 결혼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연애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귀하고 소중한 것’이 내 안에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2015년 8월 희찬(가명·3)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태어난 희찬이는 ‘고귀하고 존엄한’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무시 받고 천대 받는 생명이 되었습니다. 희찬이를 또래 아기들과 놀게 하면서 자연스레 엄마들과 친해졌습니다. 그 중 저와 성격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한 엄마에게 제가 비혼모라는 사실을 털어놨습니다. 그 후 희찬이에게서 친구들이 사라졌습니다. 저를 빼고 다른 아기 엄마들끼리 시간을 맞춰 놀기 시작했습니다. 차마 화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저 죄 없는 희찬이가 제가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위축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
비슷한 처지의 선배 비혼모들에게 넌지시 물어봤습니다. 한 아이 엄마는 서울살이가 버거워 고향에 내려가려다 “시집도 안 간 게 애 놓은 게 뭐 자랑이라고 여기까지 기어들어오려고 하노”라는 숙모의 말에 귀촌을 포기했답니다. “가족들도 저렇게 생각하는데 남들은 어떻겠어.” 그 엄마가 덧붙였습니다. “누구한테 먼저 미혼모라는 이야기 하지 마, 자기와 아이만 상처받아.”
심지어 저희 엄마, 희찬이의 외할머니는 제 아이의 존재 자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결혼하지 않을 남자와의 사이에 생긴 아기를 낳겠다는 이야기에 엄마의 첫마디는 “미쳤구나”였습니다. 엄마는 지금껏 제 아이를 한 번도 본 적도, 물은 적도 없으십니다. 제 엄마에게 희찬이는 ‘없었으면’ 하는 생명입니다.
“야 그건 좀…미혼모는 사회 최하층 사람들이잖아.” 아기를 낳은 뒤 연락이 끊겼습니다.
친구뿐이 아닙니다. 얼마 전 희찬이의 발달이 약간 늦어 병원에 검진을 갔을 때 받은 눈빛.
“사실 제가 미혼모라, 애기가 아빠랑 놀아본 적이 없거든요…”
고개를 한 번도 들지 않고 타이핑을 치던 레지던트가 그 순간 절 쳐다봤습니다. 그 눈빛은 제가 이 사회에서 어떤 존재인지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는 게 무서워지자 집에 처박혀있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자려고 누워 있으면 숨이 막히면서 땀이 뻘뻘 납니다. 사실 저는 저와 희찬이 모두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희찬이가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저희 모자는 어딘지 모르게 가깝게 하기 싫은, 불결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와 제 아이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집에 갇혔습니다.
○ “태아는 모(母)와 별개의 생명체로 독자적 생존능력이 있다”
아이 아빠는 번듯한 직장에 집안도 좋았습니다. 그래서 할머니 손에 자란 시골 여자인 저와 결혼할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을 겁니다. 그는 만삭이 될 때까지 “낙태하면 너를 다시 만나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손 벌리지 않을게. 아이 데리고 앞에 나타나지도 않을게” 빌고 나서야 아이를 낳을 수 있었습니다. 출산하던 날에도 제 옆에 아이 아빠는 없었습니다.
아이가 여섯 살이 될 때까지 비혼모 시설을 전전했습니다. 제가 받은 돈은 기초수급비 32만 원 뿐. 아이를 위한 지원은 하나도 받지 못했습니다. 분유와 기저귀 물티슈 같은 아기 용품을 사고 나면 손에는 한 푼도 남지 않는 날이 많았습니다. 서울에는 친척이나 친구도 없어서 아이를 봐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이가 일곱 살 때는 일하던 공방에 돗자리와 이불을 깔아놓고 몰래 살았던 적도 있습니다. 불을 켜면 주인에게 들킬까 촛불을 켜고 책을 읽어줬습니다. 아이의 시력이 나쁜 게 그 탓인가 아직도 자책합니다. 아이는 태어나기만 했을 뿐, 열세 살이 된 지금까지 저와 떨어져서 한 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저를 도와줄 사람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이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번호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재판관님, 저는 홀로 아이 낳은 걸 후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견딘 지난 세월을 생각하면 낙태를 결정하는 여성들에게 손가락질 할 수 없습니다. 12주 된 태아의 생명은 소중히 여기라고 하지만 세상에 나온 제 아들의 삶은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아빠가 없다는 사실에 이불 속에서 눈물지으며, 넉넉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묻고 싶습니다. 생명이 그렇게 소중하다면, 그렇게 태어난 제 아이의 삶은 왜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는 것인가요? 그리고 저는 왜 이 아픔을 엄마라는 이유로 혼자 겪어야 하나요?
○“임부의 자기결정권이 낙태죄로 인해 과도하게 제한되지 않는다.”
재판관께서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낙태죄로 인해 과도하게 제한되고 있지는 않다’면서 낙태를 허용해선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겨울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저는 그 어떤 것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철저히 ‘자기결정권’을 포기 당했습니다.
유진(가명·4개월)이를 낳은 건 절대 후회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눈을 찡긋하며 작은 손으로 제 손을 포갤 때가 숨통이 트이는 유일한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인생은요? 일에 대한 성공도 행복한 결혼생활에 대한 희망도 어그러졌습니다.
의류회사에서 원단 고르는 일을 했습니다. 승진을 앞두고 ‘임신 3주차’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3년가량 만난 그 남자와는 결혼까지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임신한 저를 침대에서 밀어 떨어뜨리고 면전에서 담배를 피워댔습니다. 전부터 폭언은 있었는데 그게 폭력으로 이어진 겁니다. 오만 정이 다 떨어진 저는 “아이는 지울 테니 헤어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아이를 지우면 낙태죄로 고소하겠다고 협박하더군요. 그러더니 “앞으로 만나는 남자마다 찾아가서 알릴 거다. 가장 비싼 변호사를 사서 널 괴롭힐 거다”라고 했습니다.
배는 점점 불러왔습니다. 5개월이 지나자 아이에겐 팔, 다리가 자라있었습니다. 수술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그 남자와 살거나 혼자 키워야 합니다. 어느 쪽이나 지옥 같았습니다. 그럴 바엔 죽어야겠다고 생각해 뛰어내리거나 목을 매려고도 했습니다.
회사에서는 민폐 끼치기 일쑤였습니다. 업무 집중도 안 되고 애꿎은 후배에게 화풀이도 했습니다. 임신 사실을 알려 출산 휴가를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사표를 냈습니다. 1년 넘게 입사를 준비했던 첫 직장이었습니다.
출산이 임박하자 남자는 태도를 바꿨습니다. “낳든지 죽이든지 네 맘대로 해라.” “애 핑계로 내 발목 잡을 셈이냐.” 저를 ‘꽃뱀’ 취급했습니다. 결국 비혼모 단체의 도움을 받아 홀로 유진이를 낳았습니다.
출산 후 체중은 24kg이 늘고 부분 탈모까지 왔습니다. 젖 먹이느라 가슴은 처졌고 피부는 푸석해지고 기미가 올라옵니다. 열 달간 엄마가 될 몸과 마음의 준비를 못했기에 급격한 신체 변화에 우울증까지 왔습니다.
재판관님, 아이를 낳고 4개월이 흘렀습니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저와 제 딸은 수급비 70만 원, 양육수당 15만 원으로 살아야 하는 극빈층입니다. 아이가 36개월이 넘으면 식비 지원이 끊긴다고 하더군요. 결혼도 안 하고 아이만 낳은 저를 받아주는 회사가 있을까요? 재판관님, 제가 꿈꾸던 인생은 이런 게 아니었습니다.
이지훈기자 easyhoon@donga.com
김예윤기자 yeah@donga.com
최지선기자 aurinko@don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