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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기의 음악상담실]상처가 권력이 될 때

입력 | 2017-12-02 03:00:00

<52> 에픽하이의 ‘연애소설’




김창기 전 동물원 멤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늘 새로우면서도 보편성을 잃지 않는 영특한 에픽하이가 새 앨범을 냈습니다. 처음에는 진부한 실연 이야기를 ‘우리 한때 자석 같았던 건, 한쪽만 등을 돌리면 멀어진다는 거였네’ ‘가진 게 없던 내가, 네가 준 상처 때문에 슬픈 사랑의 주인공이 되어본다’ 같은 비유로 깔끔하게 풀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서 갑자기 숨이 턱 막혔습니다. ‘네가 남겨준 상처 덕분에, 줄 것이 없었던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 ‘나도 그랬었고, 아직도 그러고 있고, 내가 상담하는 사람들 또한 그러고 있지. 그 악순환의 고리는 정말 질겨서 잘 끊어지지 않지.’

상처는 커다란 힘을 가졌습니다. 그 힘이 나에게로 향할 때에는 나를 지옥에 빠뜨릴 수 있지만, 상대방에게로 향할 때에는 상대방에게 그만큼의 상처를 주고 상대방을 같은 지옥으로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상처를 받은 사람은 그 책임을 전적으로 상대방에게 떠넘기지만,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은 상대방의 것이 아닌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받는 상처의 대부분은 과거의 상처가 되풀이되는 것이니까요. 어릴 적 비난, 무시, 가해 등으로 받았던 상처가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가 현실에서 비슷한 자극을 받았을 때 재경험되는 것이죠.

현실에서 부정적 자극은 대부분 나와 매우 가까운 사람이 줍니다. 그 사람은 처음에는 미안해하며 달래주려 애쓰지만, 문제는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특히 ‘상처를 잘 받는 사람들’은 ‘상처의 책임자’를 쉽게 풀어주지 않으니까요. 상대방을 원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파괴적인 생활로 죄책감을 유발해서 떠나지 못하고 복종하게 만듭니다. 상처가 권력이 되는 순간이죠.

권력으로서 상처의 용도는 단 하나뿐입니다. 원망하고 복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죠. 스스로가 잘해서 사랑과 인정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거의 없다고 믿기에, 죄책감을 유발해서 자신을 돌봐주고 지켜줘야 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감이 낮을수록 의존성은 높아지죠. 상처에 책임을 지게 된 상대방에게 어린 시절 받지 못했던 사랑과 보살핌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아내의 잘못을 탓하며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 남편의 잘못을 탓하며 온 가족에게 전적인 관심과 위로를 강요하는 아내가 상처를 권력으로 이용하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이럴 땐 먼저, 상처받은 사람의 고통이 안타깝더라도 단호하게 선을 그어 독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당신이 준 상처니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당신이 다 해결해야 한다는 억지를 거부해야 하는 것이죠. 상처는 주고받는 것이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함께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배할 대상을 잃은 권력과 의존심은 다른 대상을 찾아 나서게 만듭니다. 만일 새로운 대상을 찾는다면 나는 진정으로 필요한 존재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조정당하는 것을 거부하면, ‘가해자가 된 피해자’는 결국 스스로 일어나려 노력하게 됩니다. 그만큼 우리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이죠. 결국 그 사람이 스스로 발전적인 삶을 살아가려는 증거들을 지속적으로 보일 때 다시 돕기 위해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김창기 전 동물원 멤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