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에픽하이의 ‘연애소설’
김창기 전 동물원 멤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서 갑자기 숨이 턱 막혔습니다. ‘네가 남겨준 상처 덕분에, 줄 것이 없었던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 ‘나도 그랬었고, 아직도 그러고 있고, 내가 상담하는 사람들 또한 그러고 있지. 그 악순환의 고리는 정말 질겨서 잘 끊어지지 않지.’
상처는 커다란 힘을 가졌습니다. 그 힘이 나에게로 향할 때에는 나를 지옥에 빠뜨릴 수 있지만, 상대방에게로 향할 때에는 상대방에게 그만큼의 상처를 주고 상대방을 같은 지옥으로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부정적 자극은 대부분 나와 매우 가까운 사람이 줍니다. 그 사람은 처음에는 미안해하며 달래주려 애쓰지만, 문제는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특히 ‘상처를 잘 받는 사람들’은 ‘상처의 책임자’를 쉽게 풀어주지 않으니까요. 상대방을 원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파괴적인 생활로 죄책감을 유발해서 떠나지 못하고 복종하게 만듭니다. 상처가 권력이 되는 순간이죠.
권력으로서 상처의 용도는 단 하나뿐입니다. 원망하고 복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죠. 스스로가 잘해서 사랑과 인정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거의 없다고 믿기에, 죄책감을 유발해서 자신을 돌봐주고 지켜줘야 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감이 낮을수록 의존성은 높아지죠. 상처에 책임을 지게 된 상대방에게 어린 시절 받지 못했던 사랑과 보살핌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아내의 잘못을 탓하며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 남편의 잘못을 탓하며 온 가족에게 전적인 관심과 위로를 강요하는 아내가 상처를 권력으로 이용하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이럴 땐 먼저, 상처받은 사람의 고통이 안타깝더라도 단호하게 선을 그어 독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당신이 준 상처니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당신이 다 해결해야 한다는 억지를 거부해야 하는 것이죠. 상처는 주고받는 것이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함께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김창기 전 동물원 멤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