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교장 사진. 동아일보DB
서울 종로구 평동 강북삼성병원 안에는 경교장(京橋莊·사진)이라는 건물이 들어서 있다. 한때 강북삼성병원 본관으로 쓰기도 했던 이 건물이 유명한 건 해방 후 귀국한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이 사저(舍邸)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백범 선생이 안두희(1917~96)에게 피살당한 곳도 경교장이었다.
한때 ‘동교동’이 DJ(김대중), ‘상도동’이 YS(김영삼)를 뜻했던 것처럼 경교장은 곧 백범 선생과 임시정부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실제로 경교장은 임시정부 청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45년 오늘(12월 4일)자 동아일보는 경교장에서 처음 열린 임시정부 국무회의 소식을 전했다.
1945년 12월 4일자
동아일보는 이날 1면 머리기사에 ‘동경(憧憬)턴 고국서 역사적 국무회의’라고 제목을 붙였다. 동경턴은 ‘동경하던’ 그러니까 ‘간절히 그리워하던’이라는 뜻이다.
오랫동안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임시정부 요인에게 제일 큰 문제는 국내 정치 기반이 빈약하다는 점이었다. 당시 임시정부 대변인을 맡고 있던 조소앙 선생(1887~1958)은 국무회의 후 기자들과 만나 “오전에 국무회의가 개최되었으나 김구 주석 이하 선착한 일행이 지난 10일간 국내 정세와 지나온 40년간 국내의 역사를 읽었는데 작일(昨日·어제) 들어온 우리 일행은 아직 국내 역사를 읽지 못하고 방금 첫 페이지를 열어 놓았을 뿐”이라며 “함으로(이런 이유로) 기자 제씨(諸氏·여러분)가 궁금히 알고 듣고자 하는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못하겠다. 이 점에 있어서는 우리가 전부 독파(讀破)한 후 들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실제로는 국내 정치 문제보다 해외 발 폭풍이 더 컸다. 미국, 옛 소련, 영국 외무장관이 모스크바에서 모여 한국을 신탁통치 하기로 결정한 것. 임시정부는 신탁통치 반대(반탁) 운동을 벌이면서 국권을 되찾으려 애썼지만, 이런 활동이 미군정의 반발을 사면서 신탁통치 기간 3년 동안 형식적인 존재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임시정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