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업체 A사 최모 회장(89)에게 서울 종로구의 한 도심 재개발 사업은 불행의 시작이었다. 2000년 7월 서울시는 최 회장 소유의 1775m² 규모 땅과 건물이 포함된 지역을 도심재개발 구역으로 지정했다. 최 회장 등 일부 지주는 개발에 반대해 지방자치단체 등을 상대로 소송을 벌였다.
하지만 재개발 사업은 결국 강행됐고 최 회장은 2009년 땅과 건물을 강제로 수용당했다. 최 회장의 은행계좌에는 공탁금 명목으로 262억 원이 입금됐다. 최 회장은 공탁금을 은행에 예치해둔 채 수용당한 토지를 되찾기 위해 다시 소송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12년 4월 최 회장의 계좌에 들어있던 공탁금 중 162억 원이 돌연 최 씨의 둘째 딸과 그의 가족 계좌로 이체됐다. 뒤늦게 이를 안 최 회장은 둘째 딸 최 씨가 자신 몰래 공탁금을 빼갔다며 2015년 4월 예금반환 소송을 냈다.
최 회장은 이에 앞서 2013년 12월 첫째 딸과도 A사 주식 문제로 송사를 벌여야 했다. 첫째 딸이 가짜 주식양도양수계약서를 꾸며 최 회장 소유의 A사 지분 44.8%를 빼돌린 때문이었다.
재산을 노린 딸들의 행동에 위협을 느낀 최 회장은 2015년 10월 지인 손모 씨(64·여) 부부 등에게 신변 보호와 민·형사 재판 변호사 선임 등 권한을 위임하는 위임장을 작성했다.
재판 과정에서 둘째 딸 최 씨 측은 “최 회장이 고령으로 지적 능력이 떨어졌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오히려 최 씨가 최 회장의 비서를 통해 몰래 최 회장의 커피에 신경안정제를 탄 사실이 드러났다. 최 회장의 비서가 두 딸이 재산을 빼돌릴 때 최 회장의 신분증과 도장 등을 몰래 건네며 도움을 준 사실도 밝혀졌다.
최 회장은 올 5월까지 이어진 두 딸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최종 승소했다. 딸들이 최 회장의 허락 없이 공탁금을 인출한 사실과 A사 주식을 빼돌린 사실을 법원이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최 회장의 위임을 받아 소송을 진행한 손 씨 등은 최 회장에게 소송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하고 있다. 최 회장은 지난해 초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현재 한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고 있다. 최 회장의 보호자로 나선 둘째 딸 최 씨는 손 씨 측이 최 회장과 접촉하는 것을 막고 있다. 병원도 딸 최 씨의 요청에 따라 손 씨 측의 접견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권오혁 기자 hyu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