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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잡史]호랑이 가죽 원산서만 한 해 500장 거래

입력 | 2017-12-04 03:00:00

조총 사냥꾼 ‘산척’




서울 외곽에서 카메라에 포착된 조선 말기 호랑이 사냥꾼들. 영국인 허버트 폰팅이 촬영했다. 동아일보DB

“변방 백성 중에 조총을 잘 쏘는 자를 봤습니다. 호랑이가 3, 4간(1간은 약 1.8m 남짓 거리)쯤에 있을 때 비로소 총을 쏘는데 명중시키지 못하는 예가 없으니 묘기라 할 수 있습니다.”(승정원일기, 1724년 10월 15일 기사에서)

조선에서 중요하게 여긴 두 가지 야생동물이 있다. 꿩과 호랑이다. 꿩고기는 종묘 제례에 빠질 수 없었다. 임금 생일이나 큰 명절에도 생치(生雉·살아있는 꿩)를 30마리씩 바쳤다. 호랑이는 퇴치의 대상이었다. 영조 30년(1754년) 실록에는 경기도에서만 한 달 동안 120명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고 나온다.

꿩고기는 응사(鷹師)라는 매사냥꾼을 동원해 마련했고, 꿩을 산 채로 잡는 일은 망패(網牌)가 나섰다. 망패는 생포를 주로 하는 포획 전문 사냥꾼으로 짐승이 다니는 길목에 그물을 쳐 꿩이나 사슴을 상처 없이 잡았다.

민가에서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이들은 산척(山尺)이라 불렀다. 임진왜란 이후 조총이 보급되면서 산척 대부분은 활을 버리고 총을 들었다. 이들을 산행포수(山行砲手)라 불렀고 이후로 ‘사냥꾼’이라고 하면 으레 산행포수를 지칭했다.

평안도 강계의 산행포수가 유명했다. 호랑이 사냥꾼을 산척 중 으뜸으로 쳤는데, 강계 지역에 호랑이를 잡는 산행포수가 많았다. 개항 직후 함경도 원산항에서만 한 해 호랑이 가죽 500장이 거래되었다고 하니, 산행포수들의 실력을 짐작할 만하다.

산척의 사격술은 외국인 눈에는 묘기로 비쳤다. 고종의 고문으로 일한 윌리엄 샌즈는 ‘조선비망록’에서 산척을 “탁월한 숲 속의 사람”이라며 “화승에 불을 붙여 격발하는 구식 화승총을 들고 호랑이나 곰 가까이 다가가 단발로 급소를 저격했다”고 기록했다.

산간에 폭설이 내리면 짐승이나 산척이나 움직이기 어려웠다. 이때 산척은 설피(雪皮·덧신)를 신고 설마(雪馬·썰매)를 탔다. 설마는 스키와 똑같은 모양으로, 타면 짐승을 잽싸게 뒤쫓을 수 있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설마는 밑바닥에 기름을 칠해 속도를 높였으며 빠르기가 나는 듯했다고 적었다.

산척은 사냥 규율이 엄격했다. 산에 들어가기 전 아내와 잠자리를 하지 않았으며, 상을 당한 집에 조문도 가지 않았다. 몸을 청결하게 한 뒤 입산해 짐승을 잡으면 반드시 혀나 귀 혹은 심장을 산신에게 바쳤다. 노루나 돼지를 잡으면 바로 귀와 혀를 잘라 잎에 싸 젓가락과 함께 높은 곳에 놓고 기도를 올렸다.

1907년 9월 3일 ‘총포화약류단속법’이 시행됐다. 그해 11월까지 구식 무기인 화승총, 칼과 창이 9만9747점, 신식 소총이 3766정 압수됐다. 압수한 무기 가운데 화약과 탄약이 36만4366근이나 됐다. 총류 대부분이 산척의 것이었다.

총을 빼앗긴 산척은 다른 생업을 찾거나 간도로 이주했다. 국경을 넘은 산척 상당수가 무장독립군에 투신했다.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홍범도 장군 역시 조선의 사냥꾼, 산척이었다.
 
홍현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