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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상상력 키워야 일자리 늘어나”

입력 | 2017-12-04 03:00:00

리처드 세일러 미국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교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정계의 아웃사이더’였다면 2017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리처드 세일러 미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교수(72)는 ‘경제계의 아웃사이더’로 꼽힌다. 그는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라는 전통 경제학의 가설을 뒤집고 인간을 때때로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비합리적 동물로 봤다. 여기서 경제학에 심리학을 접목한 행동경제학이 시작됐다.

그의 파격은 주류 경제학자의 비판을 샀지만 세계에 신선한 자극을 줬다. 저서 ‘넛지(Nudge·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 출간 뒤 2009년 당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넛지 공저자인 캐스 선스틴 하버드대 교수를 규제정보국 수장에 앉혔고 2014년 ‘사회행동과학팀’을 백악관에 마련했다. 2010년 데이비드 캐머런 당시 영국 총리는 총리실 산하에 ‘넛지 유닛’이란 별칭의 ‘행동통찰팀’을 두고 넛지 정책을 구상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넛지 같은 행동과학을 참고해 정책을 실시한 국가는 51개국에 이른다.

세일러 교수가 넛지 열풍 약 9년 만인 올해 10월 노벨경제학상을 타며 세계가 다시 넛지를 주목하고 있다. 청년실업, 가계부채 문제 등 한국 경제 해법에 관해 지난달 말 e메일 인터뷰를 통해 들어봤다.

기자가 ‘한국 경제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다’고 첫 e메일을 보내자 그는 “한국 경제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어렵다. 하지만 한국에 넛지보다 덜 알려진 저서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Misbehaving: The Making of Behavioral Economics)’에 대해 설명하겠다”고 겸손하게 답했다. 그의 답은 기자로부터 수월한 질문을 이끌어내려는 넛지였을까. 기자는 그의 저서를 읽고 관련 질문을 보냈고 그는 나흘 만에 명쾌한 답변을 보내왔다. 물론 한국 경제에 대한 견해도 담겨 있었다.
 
‘기그 이노코미’에 청년실업 답 있다

“유능한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고 있다면 우린 청년들을 고용해 돈 벌 사업 아이템을 찾아내야 합니다. 정부는 기업들이 혁신을 꾀하는 데 장애가 되는 규제를 제거해 줘야죠.”

기자가 ‘기업이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도록 하려면 어떻게 넛지 해야 할까’를 묻자 “내가 보기에 기업들은 이미 충분한 고용장려책(incentives)을 받고 있다. 기업들의 상상력(imagination)이 부족할 뿐”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민간 기업이 창의적으로 신사업을 발굴해 청년을 고용하도록 정부가 도와야 한다는 뜻이다. 최근 일자리 창출 목표를 명시하고 고용을 주도하는 인상을 주는 한국 정부에도 교훈이 될 법한 조언이다.

세일러 교수는 좋은 사례로 우버, 에어비앤비 등이 주도하는 ‘기그 이코노미(Gig Economy)’를 꼽았다. 기그 이코노미는 기업이 산업현장에서 필요할 때마다 인력을 임시로 구해 계약을 맺는 방식이다.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내고 기업은 인력을 탄력적으로 쓰는 장점이 있다. 반면 직원을 보호할 법과 제도가 아직 부족해 노동의 질과 고용환경이 악화된다는 우려도 있다.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싶어 하는 젊은 엄마들을 고용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기업들은 기술 발달 덕에 업무의 일부라도 집에서 할 수 있는 시대가 왔으니 이런 엄마들을 고용할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그는 일자리 분야에서는 정부에 과도하지 않은 개입을 주문했지만 금융 분야에서는 생각이 달랐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일어난 이유는 사회 각층에서 잘못된 행동(misbehaving)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큰 집을 사려고 대출을 늘린 집주인, 위험한 대출상품을 소개한 ‘모기지 브로커’와 이를 승인한 금융사 임원과 신용평가기관 모두가 잘못한 거죠. 그런데 지금 미 행정부는 전 정권이 만든 금융위기 예방책을 완화하려 합니다. 우린 후퇴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경영이 선택받는 시장

세일러 교수는 그의 최신작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에서 강조한 기업의 공정성(fairness)도 언급했다.

“기업들은 긴 호흡으로 경영해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공정한 이미지를 유지하는 데 애써야 합니다. 미국에서 허리케인 사태 때 홈디포와 월마트는 건축 자재를 피해 지역에서 저렴하게 팔았어요. 이건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죠. 그 지역 사람들이 집 전체를 지을 자재를 사려 이 기업들을 다시 찾았고 기업들은 수익을 늘렸습니다.”

전통 경제학 관점에서 생각하면 허리케인이 닥쳐 건축 자재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 때 가격이 올라가기 마련이다. 전통 경제학이 믿는 ‘합리적 동물’이라면 이런 논리를 이해할 법하다. 하지만 소비자는 세일러 교수가 말하듯 합리적이지만은 않기에 허리케인 뒤 가격을 올린 기업에 ‘이런 탐욕스러운 것들 같으니’라며 등 돌린다.

그는 저서에서 합리적으로 행동했지만 공정한 이미지를 잃은 탓에 소비자로부터 외면받은 사례로 우버를 소개했다. 택시 수요가 폭증할 때 가격을 급등시키는 우버의 가격 정책은 경제학적으론 합리적이지만 비난을 받았다. 이에 세일러 교수는 소비자 반응과 수익 등을 고려해 “우버는 최고 요금을 정상가의 3배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소 뜬금없지만 그에게 미국의 대북 정책에 대한 견해도 물었다. 행동주의적으로 봤을 때 미국의 대북 전략이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나오게 하는 데 적합한지가 궁금했다.

“미국과 북한 지도자들이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제대로 행동하고 있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 설전은 내가 보기에도 성공할 수 있는 정책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가 현 상태에만 너무 안주하다가 북한 주민들이 폭발하는 건 아닐지 두렵다”며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한 대북 기조를 비판했다.
 
‘불량 기업’ 임원 거래 주목하라

세일러 교수는 행동경제학적인 접근으로 투자에서도 성공했다. 그가 설립한 풀러&세일러 자산운용의 ‘언디스커버드 매니저스 비헤이비어럴 밸류펀드(undiscovered managers behavioral value fund)’는 2009년 3월 이후 약 512%의 수익률을 내고 있다. 그에게 투자 비법을 물었다.

“우리는 우선 일정 기간 동안 수익이 좋지 않은 주식에 주목해요. 일반 투자자들이 ‘불량 회사로구먼’이라고 인식하기에 충분한 시간 동안 수익을 못 본 회사들이죠. 이 회사 주식을 관찰하면서 고위 임원 같은 기업 내부자들이 주식을 사들이는 시점을 분수령으로 보고 투자를 합니다.”

그는 “투자할 때 ‘매몰비용’에 집착하지 말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손해 보고 있는 상품을 그간 들인 돈이 아깝다며 팔지 못해선 안 된다는 의미다.

세일러 교수가 노벨경제학상을 받기까지는 주류 경제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과 도전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 ‘경제학과 심리학을 융합한 사고의 비결’을 물었다.

“내가 경제학과 심리학을 융합했다고 설명하긴 어렵고요, ‘개방적 사고(open-minded)’가 비결이었다고 봅니다. 난 항상 ‘내가 왜 이런 방식으로 하고 있지’ 자문하고 ‘늘 이렇게 해왔으니까’라는 생각이 들면 다른 방법을 찾았습니다.”

비주류 경제학자로서 주류에 도전하는 비법도 언급했다.

“내가 전통 경제학자들로부터 강한 저항을 받는 건 맞습니다. 이런 비판에 내가 대항하는 전략은 늙은 경제학자들 생각을 바꾸려 하기보다 젊은 경제학자들이 행동경제학에 더 흥미를 느끼도록 노력한 것이랍니다. 효과가 있다고 느끼고 있어요.”
 
▼ 각국 ‘넛지 정책’ 열풍, “근거 없는 유행” 비판도 ▼
 
2009년 ‘넛지’ 한국어판이 나온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공항 소변기에 붙인 파리 스티커를 한국 화장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용자들에게 파리를 ‘조준’하는 재미를 제공해 소변이 변기 밖으로 튀는 것을 막는다는 넛지 개념을 적용한 것이다.

횡단보도 교통사고로 고민하던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지난해 초등학교 주변 건널목 직전 인도 안쪽에 노란색 발자국을 그려 넣는 넛지 정책으로 사고를 크게 줄였다. 아이들이 길을 건너기 전 인도 안쪽으로 0.5∼1m 들어간 곳의 안전구역에 있도록 유도한 것이다.

세계 각국도 넛지 정책을 도입해 큰 예산을 들이지 않고 골치 아픈 과제를 해결하는 효과를 봤다. 기업 탈세 문제로 고민하던 과테말라 정부는 탈세 기업과 개인들에게 보내는 경고 서한의 문구를 살짝 고쳤다. 세금을 안 내는 행위는 수동적인 게 아니라 능동적인 행동이며 성실한 납세자가 탈세자보다 많다는 사실을 강조했을 뿐이지만 탈세자는 줄었고 세수는 늘었다.

카타르 의료서비스기업 ‘하마드 메디컬’은 2014년 넛지 정책이 효과를 내려면 적절한 시기를 잡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공복 중에 받아야 하는 당뇨병 검사를 이슬람 금식 성월(聖月)인 라마단 기간에 실시했다. 그랬더니 고객 수가 늘었다. 고객들이 어차피 공복을 유지해야 하는 이 기간에 별 부담 없이 혈당을 확인하러 온 것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넛지가 충분한 근거가 없이 유행을 탄 이론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정부가 국민을 통제 대상으로 보게 하는 전체주의적 발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넛지 지지자들조차 관료들이 국민을 조종하고 무의식적으로 국민의 목소리를 왜곡할 위험이 있음을 인정한다”고 전했다.
  
:: 리처드 세일러 교수는? ::
 
△1945년 미국 뉴저지주 출생
△1967년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대 경제학과 졸업
△1974년 로체스터대 경제학 박사 학위 취득
△1974∼78년 로체스터대 경영대학원 교수
△1978∼95년 코넬대 경영대학원 교수
△1995년∼현재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교수
△2015년 미국경제학회장
△2017년 노벨경제학상 수상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