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커장성’에 갇힌 한국관광]<1> 황폐화된 관광생태계
2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시내면세점에서 만난 일본인 이치로 씨(49)는 이런 불만을 터뜨렸다. 실제로 이 면세점에선 화장실이나 에스컬레이터 안내조차 한국어나 영어 병기 없이 중국어로만 적혀 있었다. 안내방송도 중국어로 흘러나왔다. 중국인 관광객(유커)이 돌아온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중국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은련카드’로 결제하면 사은품을 준다는 행사문도 곳곳에 붙어 있었다. 이치로 씨는 “아무리 중국이 가장 큰 시장이라지만 유커가 아니면 서울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어 불쾌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한국 관광에서 ‘한국’이 사라지고 있다. 중국인 단체관광객을 유치하고, 이들의 면세점 쇼핑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관광산업의 수익 구조가 고착화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관광업계에선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이 없었다면 중국인 관광객에게 의존하다가 황폐화된 한국 관광 생태계의 민낯이 드러나지 못했을 것”이란 얘기마저 나온다.
○ 관광시장 다변화조차도 ‘유커 모델의 복제판’
이 때문에 꾸준히 문제로 지적됐던 쇼핑 중심의 저가 관광 구조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 유커의 발길이 끊겼던 1년 사이, 일감을 잃은 여행사들이 동남아 시장에서도 저가 관광 경쟁을 벌이면서 관광의 질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 한 동남아 전담 여행사의 대표는 “최근 급부상한 베트남 시장의 경우 현지에서 ‘한국 3박 4일 관광상품’이 35달러(약 3만8000원)에 판매되기도 했다. 한국 관광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여행사 대표는 “여행사들은 모객 수수료로 난 손해를 면세점과 쇼핑센터의 인센티브로 채우려 한다”며 “지난 1년 사이, 관광객의 국적만 바뀌었지 머릿수만 채우고 쇼핑센터로 관광객을 돌리는 저질 관광은 그대로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명동에서 만난 말레이시아 관광객 디야나 씨(34)는 “단체관광으로 한국에 왔는데, 어제 면세점을 들르고 오늘 아침에 동대문 쇼핑센터를 돈 후 오후엔 명동으로 왔다”며 “한국의 특색 있는 상품이 아니라 화장품과 옷가지밖에 없어 재미가 없다”고 덧붙였다. 동남아를 담당하는 한 여행사 가이드는 “쇼핑 외에 체험 인프라가 너무 없다. 손님들이 ‘비슷한 상품만 계속 본다’며 불만을 표하는 경우도 늘고 있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 유커만을 위한 한국 관광 생태계의 자멸(自滅)
지난해 제주를 찾은 외국인 관광객 360만여 명 중 85%가 중국인이었을 만큼 제주는 ‘유커의 천국’으로 불렸다. 관광업계는 ‘인해전술하듯’ 몰려드는 중국인 관광객의 입맛에만 맞춰 시장을 바꿔 나갔다. 그러던 중 갑작스레 사드 보복으로 유커의 발길이 끊기자 이들에게 종속된 한국 관광의 구조적 문제점이 폭발하듯 나타난 것이다.
중국 기업의 이름을 그대로 붙여 중국인 관광객을 유치했던 제주 바오젠거리의 상가 여기저기에는 ‘점포 정리’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이곳의 김대우 88한국백화 세일마트 대표는 “사드 보복 이후 월 매출이 호황기의 10% 수준에도 못 미친다”며 한숨을 쉬었다. 상가 대부분이 중국인이 선호하는 저가 의류 브랜드나 공산품 가게여서 유커 외에 다른 나라 관광객들은 거의 찾지 않기 때문이다. 생계를 위협받는 바오젠거리 상인연합회는 중국색을 벗기 위해 9월 거리 이름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중국인 단체관광객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니 영세 여행업자들조차 유커를 데려오려고 중국 현지 여행사에 1인당 8만∼20만 원의 모객 수수료를 지불하는 관행이 거의 정착된 상황이다. 여기에 면세점과 호텔도 여행사에 유커 모객 인센티브를 지불한다. 강봉효 제주K여행사 대표는 “최근 중국인 단체관광이 재개됐다고 하지만 반갑지 않다”며 “중국인 관광객에게 의존하다 보면 언제든 비슷한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남조 한양대 관광학과 교수는 “관광업계를 넘어 국가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인식하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 한 한국 관광의 위기는 결국 한국 브랜드의 추락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