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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노지현]“아이가 출근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입력 | 2017-12-06 03:00:00


노지현 사회부 기자

지난달 22일 오전 서울의 한 식당에 푸르메재단 고액기부자 모임 ‘더 미라클스(The Miracles)’ 회원 10명이 모였다. 1억 원 이상 기부했거나 5년 이내 내기로 약정한 사람들 이다.

2005년 설립한 푸르메재단은 장애아동의 재활과 자립을 목표로 하는 비영리단체다. 1만 명 넘는 개인 기부자가 낸 돈과 기업 기부금, 정부보조금을 종잣돈으로 지난해 4월 마포구 상암동에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을 열었다. 발달장애아동이 신체 및 언어치료를 받을 수 있다.

이날 더 미라클스 회원들이 논의한 주제는 장애아동이 성인이 됐을 때 일할 수 있는 일터였다. 회원 중에는 사고를 당해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발달장애가 있는 아들을 둔 사람도 있다.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는 늘 ‘내가 우리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 부모가 죽은 뒤 홀로 남겨진 장애 자녀가 독립해서 살기란 거의 불가능한 현실을 걱정해서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는 “어머니들의 소망은 아이들이 훈련받을 수 있고 지속가능한 사업장에서 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애인을 고용하는 사업장은 많다. 그러나 대부분 규모가 작거나 기술을 계속 연마하기 어렵고, 제대로 된 급여를 받지 못하는 곳도 있다. 일부 업체는 실제 장애인을 고용하지 않으면서 ‘장애인 고용업체’라며 물건을 강매하다 적발되기도 한다. 장애인이 일하는 업체를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악용해 되레 불신이 싹트게 만드는 셈이다.

기업도 고민이다. ‘장애인 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에 따라 근로자를 50명 이상 고용하는 기업은 전체 피고용자의 2.9%(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3.3%)는 장애인을 고용해야 한다. 그래서 자회사 형태로 납품업체를 만들어 장애인을 고용하는 대기업도 있다. 장애인이 일하는 기업에서 만든 물품을 구매하면 그만큼 의무고용률이나 부담금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장애인 100명을 고용한 업체가 생산한 물품 전체를 구매하는 기업은 장애인을 100명 고용한 것으로 인정해 준다. 장애인 고용이 적절하지 않은 기업은 정부에 부담금을 낸다.

푸르메재단은 장애인이 잘할 수 있는 업종을 모아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터를 확보해 기업이 낸 투자분담금으로 생산시설을 지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일터를 구상하고 있다. 직업훈련을 받을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 국가보조금만으로 사는 장애인이 아니라 엄연한 사회구성원으로 살게 하자는 것이다. 제대로 된 업체에 고용된다면 그곳에서 생산한 제품을 사려는 소비자도 많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물론 현재는 아이디어 차원일 뿐이다.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땅을 구하고 생산시설을 지으려면 향후 10년간 약 400억∼500억 원이 필요하다고 한다.

정부가 손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장애인고용공단에서는 장애인 교육과 일자리 알선도 하고 있다. 장애인을 고용하는 사회적 기업에 지원도 하고 있다. 그러나 양질의 일자리는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장애인을 복지 수급자로 보고 예산을 투입하고 가족이 돌본다는 패러다임 역시 여전히 공고하다. 장애인만이 정부 복지의 대상은 아니다 보니 정책을 전환하는 데도 항공모함이 항로를 바꿀 때처럼 오랜 시간이 걸린다. 수혜가 아니라 비장애인과 같은 일자리가 시급한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혹독한 시간이다. 하지만 일할 수 있는 장애인에게 스스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가치 있는 정책 전환이다.
 
노지현 사회부 기자 isityo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