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지진매뉴얼 비웃는 한국은 업데이트되지 않는 매뉴얼과 요령 있는 작업자의 나라 계속 업데이트되는 매뉴얼과 FM작업자의 조합이 선진국 정부 정책도 일종의 매뉴얼인데 시행착오 반추 없이 정책 나열 이 나라가 신생독립국이냐
이정동 객원논설위원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
생산현장의 작업자 앞에 매뉴얼이 놓여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매뉴얼대로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요령을 더해서 어찌 보면 더 효율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런 상태가 한참 지나고 나면 매뉴얼과 작업현장의 거리가 더 멀어지고 이제는 매뉴얼을 볼 필요가 없거나 보지 않는 게 더 도움이 되는 상황이 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업데이트되지 않는 매뉴얼과 요령 있는 작업자의 조합’이다. 국내 산업현장의 상황을 이보다 더 짧게 요약해 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글로벌 선진 기업에도 당연히 생산현장이 있다. 모니터링 해보면 바보스러울 만큼 매뉴얼대로만 작업을 하고 있다.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렵고 한눈에 척 봐도 답답하고 비효율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반전은 작업 후에 있다. 작업하는 동안 생겼던 시행착오와 개선사항을 집요하게 기록하고 철저하게 모은다. 그 경험 데이터를 바탕으로 매뉴얼을 갱신하고 작업자는 새로운 매뉴얼에 따라 또 정석대로 실행한다. 한마디로 ‘계속 업데이트되는 매뉴얼과 에프엠(FM) 작업자의 조합’이다.
매뉴얼을 만들고 정석대로 시행하고 시행착오를 가감 없이 기록하고 그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매뉴얼을 고쳐 나가는 이 단순한 사이클이 우리 산업현장에서는 왜 지켜지지 않는 것일까? 우선, 당면한 과제를 어떻게든 완수하는 것이 급하기 때문에 매뉴얼을 만들 시간이 없다. 설사 매뉴얼이 있어도 그걸 그대로 지키고 있자면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기 십상이다.
그뿐만 아니다. 시행착오 역시 시간이 없거나 나만의 것으로 감추고 싶거나 혹 불이익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게 상책이다. 축적된 경험 자료가 없으니 매뉴얼을 최고 상태로 만들 수도 없다. 결국 해법은 최신 매뉴얼을 글로벌 선진 기업으로부터 다시 도입하는 것이다. 전형적인 악순환이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말이 있다. 우리 산업계 현실은 계통발생이 없이 개체발생만 존재한다. 쉽게 말해서 과거 시행착오 경험을 부정하거나 쌓아두지 않으니 개인기와 임기응변으로 대처하게 되고 조직 시스템은 항상 같은 수준에서 맴돈다는 뜻이다.
정부 정책도 일종의 매뉴얼이다. 얼마 전 참석했던 정부 주관 회의에서 정책 자료집을 보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관련 정책들에서 무슨 시행착오 경험을 얻었는지 진지한 반추는 찾아볼 수 없는데 화려한 목표와 정책 과제들이 새로운 것인 양 생경스럽게 나열돼 있었다. 지금 막 나라 이름을 지은 신생 독립국에서 만든 리포트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선진국은 어느 특정 시점에 보면 ‘꽉 막힌 매뉴얼 사회’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정한 모습은 ‘집요한 매뉴얼 업데이트 사회’다. 오늘도 매뉴얼 없이 바쁘기 짝이 없는 한국 사회가 지향해야 할 모습이다.
이정동 객원논설위원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