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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이진영]공시족을 위한 고건의 충고

입력 | 2017-12-08 03:00:00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퇴직한 차관 가운데 테니스를 잘 치는 이가 있다. 그는 공무원 테니스 동호회원 시절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있었다”고 했다. 고건 전 총리(79)다. “공격은 안 하고 수비만 하니 이길 수가 있어야지요. 참 멋없는 양반이죠.”

테니스 코트에서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던 그는 정치인은 될 수 없는, 뼛속까지 안정적인 행정가였나 보다. 이 멋없는 양반은 공직생활 30년간 장관 세 번, 서울시장 두 번, 총리 두 번,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내며 ‘몽돌’ 정치인들이 두서없이 던져놓은 과제를 차분히 풀어내는 ‘받침대’ 역할을 했다. 그 성공의 기록이 얼마 전에 나온 ‘고건 회고록’이다. 멋없는 양반답게 ‘뒷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심심한 글이지만 12년 만에 가장 큰 장(중앙과 지방 공무원 합쳐 2만4000여 명 증원)이 서 들떠 있는 ‘공시족’이라면 밑줄 치며 읽어볼 만하다.


①왜 공무원이 되려 하나=대졸 미취업자 10명 중 7명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다. 공무원 ‘되려는’ 이가 많다. 하지만 공무원 ‘하려는’ 이는 드물다. 소명의식이 없다는 뜻이다. 그는 ‘군수가 되어 한 고을을 책임지고 잘 살게 만들고 싶어’ 고등고시를 준비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데 감천까지는 못 해도 감민(感民)은 하자, 이게 좌우명이었다.

②물먹을 때 잘해야=박정희 정권 때 야당 의원을 아버지로 둔 탓에 첫 발령지인 내무부에서 3년 반 동안 보직 없는 사무관 생활을 했다. 그는 지방행정에 관한 해외 서적을 읽고 기획안도 만들어가며 이 시기를 견뎠다. 중앙부처의 정책이 지방 현장에서 어떻게 집행되는지도 눈여겨봤다. 이때 공부가 ‘행정 9단’으로 커가는 밑천이 됐다.

③청렴은 스펙이다=37세에 최연소 전남도지사로 임명되자 아버지는 “남의 돈 받지 말라”며 친척들에게 돈을 모아 매월 도지사 월급의 3배가 되는 돈을 판공비로 부쳐줬다. 공직을 떠나 박봉마저 못 받을 때는 동네 주민들이 쌀을 걷어다 준 적도 있다. 관행이던 전별금을 마다할 정도로 털릴 먼지 없게 처신한 덕에 대통령이 6번 바뀌는 동안 다치지 않고 소신껏 일할 수 있었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지자이렴(智者利廉)이라고 했다. 지혜로운 자는 청렴함을 이롭게 여긴다.

④내가 해도 불륜이다=공직을 떠나 있던 20년을 포함해 50년을 공인으로 살았는데 아내와 세 아들도 긴장하며 살았다. 지방 발령을 받은 공무원들은 자녀 교육을 위해 두 집 살림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는 전남도지사로 발령받자 서울사대부중에 다니던 아들을 광주 학교로 전학시켰다. 1998년 민선 서울시장 시절 전자시스템을 보급했는데 컴퓨터 관련 벤처사업을 하는 큰아들은 시청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했다. 2003년 노무현 정부 때 여소야대 국회의 총리 인사청문회를 말짱히 통과한 비결이다. 명예 아마 5단인 그는 바둑 용어인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내 말을 먼저 살리고 남의 말을 잡아라)’를 응용해 ‘아성연후(我省然後)’라는 경구를 새겼다. ‘내로남불’은 잊어라. 남을 비판하기 전에 나부터 돌아보자.

⑤코드가 아니라 주파수 맞추기=코드는 닫힌 채널, 주파수는 누구나 참여해 소통하는 열린 채널이다. 아랫사람보다는 윗사람과 주파수 맞추기가 어려운 법. 항명할 수밖에 없는 순간도 온다. 그는 7번 사표를 썼다. “정권은 권력이기 때문에 임기가 있지만 행정은 봉사여서 임기가 없다. 헌법 7조에 ‘공무원은 국민에 대해 책임진다’고 나온다. 공무원은 이것만 지키면 된다.” 그가 행정가로서 ‘이기는’ 삶을 살아온 비결이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