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한국인 첫 번째 비행사는 누구일까?
이 질문에 안창남 선생(사진)을 떠올리실 독자 분이 적지 않으실 터. 그 옛날 유행한 노랫말처럼 ‘하늘엔 안창남, 땅에는 엄복동’ 아닌가. (엄복동 선생은 당대를 대표하던 사이클 선수였다.)
안 선생이 일본 고쿠리(小栗) 비행학교를 졸업한 건 그해 11월이었으니 안 선생이 이들보다 아홉 달 늦었던 셈.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안 선생을 한국 최초 비행사라고 알고 있는 이유는 뭘까. 1922년 5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정답이 있다.
당시 동아일보는 안 선생이 고국 방문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면서 “조선 사람으로서 조선에서 비행기를 탐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니까 안 선생은 한반도를 비행한 첫 번째 한국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기사에 “그는 작년부터 모국 방문 비행을 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계획 중이더니 이번에 여러 가지 준비가 되고 비행기까지 준비되었음으로…”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나중에 ‘금강호(金剛號)’라 부르게 되는 이 비행기를 마련한 것 역시 동아일보였다.
실제로 안 선생이 경성(현 서울)에 도착한 건 그해 12월 5일이었고,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서 시범 비행을 선보인 건 닷새 뒤였다. 동아일보는 그해 오늘(12월 9일)자에 이튿날 열릴 비행을 앞두고 안내 기사를 내보냈다.
이 기사는 “쾌활한 용사의 공중에 오르고 나리는 광경을 가까이 보는 이에게는 상당한 관람료를 받기로 당초에 후원회 위원회에서 결정했으나 본래 이번의 고국 방문 비행으로 말하면 민족적으로 응원하는 아래에 거행되는 것 일뿐 아니라 이번에 일반 과학에 관한 지식과 취미를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이에게 보급케 하고저함이 그 본의임으로 다시 협의한 결과 당일 비행장에서 한 푼의 입장료를 받지 않고 일반에 널리 공개하기로 결정하였음으로 전차비나 기찻삯만 가지면 누구든지 마음대로 와서 구경하게 되었더라”고 전하고 있다.
당시 경성 인구 30만 명 중 5만 명이 여의도로 몰릴 만큼 이 비행은 인기를 끌었다. 동아일보는 그달 11일자 기사를 통해 다시 행사 소식을 전했다.
국토교통부 항공로별 교통량 분석에 따르면 올해 3분기에 한국 공항에서 뜨고 내리거나 한국 공역을 지나간 비행기는 하루 평균 2083대에 달한다. 41초에 한 대씩 머리 위로 비행기가 날아가는 셈이다. 한국인 비행사 숫자도 이제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지금 생각해 보면 비행사 한 명이, 비행기 한 대가 뭐 대단했을까 싶다.
하지만 당시 안 선생과 금강호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았다. 당시 동아일보는 비행기를 “20세기 과학문명의 자랑거리”로, 안 선생을 “귀신같은 재주를 가진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렇게 동아일보가 띄운 한국 첫 비행기는 민족적 자존심과 함께 하늘 높이 떠올랐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