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형권 경제부 차장
용어나 표현은 인식과 사고에 영향을 주고, 그것이 곧 구도(프레임·frame)가 된다.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은 결국 프레임의 승리다.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토대)은 그대로일 텐데, 정권이 바뀌자 모든 ‘창조 경제’가 ‘혁신 경제’로 바뀌었다. 정부 부처의 ‘창조행정담당관’도 ‘혁신행정담당관’으로 개명됐다고 한다. ‘창조와 혁신’은 늘 붙어 다니는 실과 바늘 같은 표현인데 한국에선 상당 기간 작별해 있어야 한다. 경제 정책도 프레임 게임이니까.
흔히 세금은 죽음에 비유된다. 최대한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초(超)’라는 접두어 하나로 증세에 성공했다. 과세표준 ‘3000억 원 초과’의 초대기업 77개, ‘3억 원 초과’의 초고소득자 9만3000명 정도가 부자 증세의 대상이 됐다. 대기업도 아니고 초대기업, 고소득자도 아니고 초고소득자라면 세금 더 내는 게 당연하다는 프레임이 성공적으로 작동한 결과다. ‘초’란 접두어가 합계 3조4000억 원이란 막대한 세수를 확보해 줬다.
“거위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깃털을 살짝 빼내는 식으로 세금을 더 거두는 것이다.” 2013년 8월 당시 청와대의 대통령경제수석은 ‘세제 개편안이 봉급생활자와 영세상인의 세금 부담을 늘린다’는 불만에 이렇게 해명했다 “털 뽑힌 거위(시민)들의 아픔을 아느냐”는 거대한 분노만 촉발했다. 그때 한 친박(친박근혜) 의원조차 “많은 수의 거위 깃털을 뽑는 것보다 적은 수의 낙타에서 얻는 털의 양이 더 많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 낙타가 지금의 초대기업, 초고소득자인 셈이다. 더구나 정부와 여당은 ‘핀셋 증세’를 강조한다. 거위 깃털을 뽑을 때나 쓸 수 있는 핀셋으로, 낙타 가죽 벗기기를 해낸 셈이다.
미용도구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증세 같은 어려운 수술을 척척 해내니 신의(神醫)의 수준이라 할 만하다. 다만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경제학 경구(警句)가 마음에 걸린다. 참 쉬워 보이는 핀셋 프레임 경제의 무거운 대가는 없는 걸까.
부형권 경제부 차장 bookum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