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잊혀진 전쟁 ‘정유재란’ 연재를 마치며, 3인 좌담
좌담 중인 이대순 한일협력위원회 부회장, 김병연 임진·정유 역사재단 추진위원회 위원장, 최영훈 논설위원(왼쪽부터).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정세가 심상치 않다. 정유재란의 경험을 통해 짚어 보아야 할 점은?
그런 점에서 정유재란 당시 국난을 극복한 동력은 정부보다는 일반 백성들의 호국 혹은 국토 수호 정신과 열정적인 헌신에 있었다는 점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지금도 국민이 먼저 깨어서 위정자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나라를 이끌고 나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최영훈: 국가를 이끄는 위정자들의 현실 인식과 판단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 율곡 이이는 “200년간 저축해온 나라에서 2년 먹을 양식조차 없으니 나라가 나라가 아니다”며 선조 임금에게 송곳 같은 질타를 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또 자주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했다. 그러나 조선의 위정자들은 귀담아듣지 않았고 오히려 당파 논리에 집착했다. 임란 직전 일본 정세를 살피고 온 동인 계열 김성일은 일본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고, 서인인 황윤길은 쳐들어올 것이라는 정반대의 보고를 해 정세 판단에 혼란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현재도 북한 핵문제 등 사안을 놓고 우리 내부는 정반대되는 의견으로 나눠지는 등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지 못하면 420년 전의 국난이 또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김병연: 율곡 뿐만 아니라 서애 유성룡도 정유재란이 끝난 후 그간의 전쟁 경험을 기록한 ‘징비록’을 남겼다. 그런데 서애가 지난날의 잘못과 비리를 경계하는 뜻에서 남긴 ‘징비록’이 전후 조선인보다는 일본인들에게 더 많이 읽혔다는 것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현재도 한일 간 외교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우리가 일본 외교에 밀리곤 하는 것도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징비’의 정신이 부족했지 않았나 생각한다.
또 하나 ‘징비록’에서 짚어볼 것은 서애는 구원군으로서의 명군 횡포와 명나라의 심각한 내정 간섭을 깊이 우려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은 외교적 협상권도, 군 지휘권도 명에 빼앗긴 상태였다. 심지어는 조선을 명의 속국으로 만들거나, 임금을 갈아 치우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은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게 해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나라’라고 명을 떠받든 결과 청나라의 침입을 받기까지 했다.
사실 명나라는 일본이 자국 영토를 침범해오지 못하도록 하는 전략적 차원에서 조선을 지원했다. 그러니까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본토를 지키기 위한 대리전쟁을 조선에서 치른 것이다. 일본은 명을 정벌하기 위해 조선의 길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명을 치기 위한 대리전쟁의 터로 조선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이는 한반도가 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대리전쟁의 터가 되기 쉽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의 한국 외교에서도 이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이: 임진·정유 7년 전쟁이 조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은 데도 ‘치욕의 역사’라서 그랬는지 학계의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일반인이 임진왜란이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정유재란이라는 말은 잘 알지 못하고, 더욱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구별하는 이는 매우 드물다. 전쟁을 직접 겪은 조선에서는 ‘왜구의 하찮은 난’으로 치부해 전쟁의 의미를 축소시켰고, 현대에 들어와서도 전문가들의 진지한 연구가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고 본다.
반면 일본은 어떠한가. 나는 오늘(5일) 일본에서 한일협력위원회 일로 나카소네 등 일본 정치인들을 만나고 공항에서 좌담장소로 바로 왔다. 일본 정치인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성격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은 ‘분로쿠(文祿)의 역(役)’이라고 해서 명나라를 치기 위한 대외 전쟁으로, 정유재란은 ‘게이초(慶長)의 역’이라고 해서 조선 정벌 전쟁으로 구별하고 있었다. 대개의 일반 일본인들도 이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정유재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이름 붙이고서는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일본이 승리를 거둔 전쟁으로 여기고 있었다.
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 전쟁을 벌이면서 자기에게 극렬히 저항했던 규슈 지역의 다이묘 및 사무라이들과 병사들을 대거 파병했다. 히데요시는 이들을 조선에서 소모시킴으로써 자신에게 위협이 될지도 모를 저항의 힘을 무너뜨리려는 의도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전쟁에 참여한 규슈 지역 다이묘들은 철수하면서 무수한 조선 도공들을 납치해갔는데 이들이 남긴 도자기가 오늘의 일본을 일으키는 ‘자본’이 됐다. 그런 점에서 규슈 지역 사람들은 조선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동아일보의 ‘정유재란’ 연재물에서 되짚어봐야 할 점을 꼽는다면….
정유재란 당시 조명(朝明)연합 육군과 수군이 순천왜성의 왜군을 상대로 혈전을 벌인 장면을 묘사한 정왜기공도(征倭紀功圖). 명나라 종군 화가가 그린 작품이다. 순천시 제공
김: 동아일보가 정유재란 420주년을 맞아 정유재란의 역사를 과감하게 양지로 드러내준 점에 대해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드린다. 연재물에서 지적했다시피 현재 정유재란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부를 만큼 전적지가 무관심과 무분별한 훼손 속에 방치돼 있다. 국민의 의식 속에 정유재란의 의미가 희석돼 있기 때문에 아무런 제어 장치가 없이 전적지에 전혀 엉뚱한 기념물이 들어서 있는가 하면,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을 영구적으로 파괴하는 행태가 공공연하게 벌어졌다.
최: 임진·정유 7년 전쟁을 총괄해서 볼 때 전 국민적인 의병 운동을 재조명해 보는 기회가 됐다는 점도 곱씹어볼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호남 출신 의병들이 경상도의 진주성을 구하기 위해 대거 출전했고, 저 멀리 행주산성까지도 달려가 왜군과 싸운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정유재란 당시엔 이순신의 수군에 가담한 경상도 출신 백성들도 적지 않았다. 적어도 조선의 백성들은 국난을 당해서는 지역을 가리지 않고 온 국민이 합심해 극복했다. 이 점이 우리의 저력이고 나라를 지키는 힘이라고 본다.
김: 역사학계의 무관심과 현장을 방문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역사적 실체가 이번 시리즈를 통해 밝혀진 점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명량대첩 이후 이순신의 서해안 해상루트를 직접 탐사한 보도물이다(18화 기사 참조). 취재 기자가 배를 타고 당시의 판옥선 속력 등을 계산하면서 이순신 관련 섬들을 찾아다니고, 팔금도가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이 머물렀던 발음도였다는 점을 고증해낸 것은 중요한 성과라고 본다. 팔금도에는 이순신 관련 일화들이 꽤 많이 전해져 내려온다. 팔금도 사람들은 이순신이 아들 면의 피살소식을 듣고 코피를 한 됫박이나 흘려 사경을 헤맬 때 마을 주민들이 염소를 잡아 먹여 이순신을 살려냈다는 얘기를 대대로 전해 듣고 살아왔다. 지금 팔금도 사람들은 동아일보 보도를 통해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 최근 동아일보 정유재란 연재물로 상당수 고교에서 고교생들이 토론회를 열고 자기들끼리 역사 논쟁을 하는 수업도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전국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정유재란 독후감 대회가 열리고 있다. 미래를 짊어진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는 데 동아일보가 역할을 한 점을 평가한다.
―정유재란을 통해 모색해보는 한중일의 미래와 과제는….
김: 16세기 동아시아의 최대 규모 대전인 정유재란은 과거의 일과성 전쟁이 아니며, 망각된 전쟁이 돼서도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유재란 전체를 상징하는 공간에서 한중일 3국 국민 모두에게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역사 교육과 함께 3국민 모두의 평화적 공존과 발전을 모색하는 장(場)마당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런 전제 하에 임진·정유 역사재단 추진위원회는 우선적으로 정유재란 최대 격전지였던 장도 등 광양만에 죽은 3국 국민들을 애도하는 추모공원, 혹은 평화적 공존을 기원하는 평화공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최: 정부 차원과는 별도로 민간 차원에서 3국의 국민이 함께 모이는 장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한국의 후세들에게는 한중일 3국의 평화 중재자 역할을 하는 책임감과 자존감을 부여하고, 일본과 중국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평화적 공존만이 모두가 함께 잘사는 길임을 인식시키는 교육도 필요하다. 즉 동북아 평화를 기원하는 공원이자 역사 교육의 메카가 될 공간을 마련하는 일은 중요하다고 본다.
이: 정유재란에서 국난 극복의 동력을 찾아내야 한다. 나는 이를 이념에 앞서 자신과 후손들이 대를 이어가야 할 땅으로서의 국토 수호 의지로 해석하고 싶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독일의 히틀러에게 끝까지 저항해 자국을 지켜냈지만, 프랑스는 너무나 쉽게 독일군에게 점령됐다. 프랑스는 이념 갈등으로 국론이 분열돼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인한 전쟁 혐오증으로 막연한 평화무드에 젖어 있었다. 독일은 이 틈을 노려 기습적으로 프랑스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당시 프랑스에는 피를 흘려서라도 지키겠다는 국토수호 의지가 무력해진 상태였다고 할까.
김: 2018년 무술년은 정유재란이 끝난 해이자 조명연합수군의 통제사 이순신과 명 장군 등자룡이 사망한 해다. 수많은 조선군 장수와 군졸, 명군 및 왜군들이 광양만의 관음포 바다에서 죽었다. 420년이 되도록 한중일 그 누구도 이들의 넋을 달래는 위령제를 지내주지 않았다. 3국의 희생자 후손들을 모아 위령제를 지내주는 한편으로 3국 평화의 기원제가 되는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이: 등자룡은 중국의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조상이면서 노구를 이끌고 전장에 나선 장군으로 중국에서도 추앙받고 있다. 몇 해 전 시진핑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진린과 등자룡을 언급하기도 했다. 사드 배치 문제 등으로 불편해진 한중 관계가 민간차원의 이런 행사를 통해 풀리는 계기도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