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 거래 규제 착수] “친구는 1300만원 벌었대” 소문 번져… 학원비 투자했다가 날려버리기도 학생들 “거래 막히면 외국 사이트로”… “교육당국 지침없다” 학교는 손놓아
서울 강남의 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양모 군(18)은 최근 밤잠을 제대로 잔 날이 거의 없다. 200만 원을 투자한 가상화폐 가격이 떨어질까 봐 걱정돼 종일 5분 가격으로 차트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가상화폐 투자금은 양 군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어렵사리 모은 돈이다. 잠이 부족해 눈에 핏발이 설 정도지만 차트를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감이 커 견딜 수가 없다.
학교에서도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마다 친구들과 어떤 가상화폐에 투자할지 머리를 맞대고 토론한다. 양 군과 같은 반에서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에 투자 중인 학생은 10여 명이나 된다.
10대 청소년 사이에 양 군처럼 가상화폐 거래에 빠져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 ‘가상화폐 좀비’가 늘고 있다. 일부 청소년이 가상화폐 투자로 큰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돌자 유행에 민감한 청소년들이 떼를 지어 투자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양 군 학교에서도 가상화폐 투자 열풍이 분 것은 권모 군(18)이 지난해 가상화폐에 투자해 1300만 원을 번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투자 자금을 마련하려고 부모를 속이는 일도 많다. 부산의 고교생 김모 군(18)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난 직후 운전면허를 따겠다며 부모에게 100만 원을 탔다. 김 군은 이 돈을 모두 가상화폐에 투자했다가 30만 원의 손실을 봤다. 이후 김 군은 손실을 복구하겠다며 스포츠토토에 손을 댔다가 남은 돈도 모두 날렸다. 결국 김 군은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했다. 김 군은 “불법 사설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려 가상화폐를 산 친구들도 있다”고 말했다.
일선 학교들은 가상화폐 투자 열풍을 경계하면서도 아직까지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교육청 등 감독기관도 학생들의 이상 투자 열풍에 대해 그저 지켜보고만 있다. 서울 서초구의 한 고교 생활지도부장 교사는 “최근 인터넷 도박 관련 공문은 내려왔지만 가상화폐에 대해서는 별다른 얘기가 없다”고 말했다.
국내 가상화폐 거래소들은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체 규제에 나서고 있다. 지난달 말 국내 가상화폐 거래소들은 미성년자의 매매를 아예 금지하거나 새로 회원으로 가입할 때 부모의 동의서를 내도록 규정을 바꾸었다.
하지만 이미 가상화폐에 투자 중인 청소년에 대해서는 매매를 규제할 방법이 없다는 점은 여전히 문제다. 비트코인에 투자한 한 청소년은 “국내 거래소가 막혀도 외국 사이트를 통해 사고팔면 돼 문제가 안 된다”고 말했다.
황성호 기자 hsh033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