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현 한국헌법학회장
고문현 헌법학회장은 8일 동아일보에서 인터뷰를 갖고 “헌법 개정은 헌법학자들이 국가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30년 만에 찾아온 골든 찬스다. 정치권은 개헌을 정략적으로 이용할 소지가 크고 각계에서는 지역이나 직역이기주의에 기초한 개헌 주문을 쏟아내고 있어 걱정이다”며 헌법학회가 독자적인 의견을 내기로 한 배경을 설명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송평인 논설위원
“학자를 보좌관으로 아는 국회”
―왜 헌법학회의 개헌안을 따로 내놓기로 했나.
“학자가 하는 일은 병이 나면 진단을 해서 고치는 의사 역할과 비슷하다. 제왕적 대통령의 폐단이 드러났다. 헌법학자들이 올바른 처방을 내놓는 것은 1987년 이후 30년 만에 찾아온 역사적 책무이기도 하다.”
―학자들은 헌법개정특위 자문위를 통해 의견을 반영할 수도 있는데….
“헌법개정특위 의원들이 자문위로부터 한 수 배워 헌법을 만들겠다는 마음보다는 특위와 자문위의 관계를 의원과 보좌관의 관계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치권이 일방적으로 강해 정당의 정략에 따른 개헌안이 만들어질 수 있겠다는 우려도 든다.”
―19대 국회에서 김철수 서울대 명예교수 중심으로 국회의장 직속의 헌법자문위가 활동해 조문화 작업까지 마쳤다. 이번 국회에서는 과거 개헌 작업을 한 사람들이 대부분 배제되고, 학자들과 시민단체 대표들이 누가 중심이라고 할 것 없이 섞여서 활동하고 있다. 얼마나 효율적인가.
―연말까지 각 지방을 돌면서 국민대토론회가 열린다. 조문도 다 만들지 않고 국민대토론회를 여는 데 대한 비판도 있다.
“전문적 의견을 바탕으로 국민에게 이해를 구해야지 처음부터 국민을 참여시킨다고 해서 국민이 만드는 개헌이 되는 건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 언제쯤 의견을 낼 것인가.
“2006년 헌법학회 이름으로 헌법 개정안을 만든 적이 있다. 이를 토대로 검토하면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현재 헌법학회 고문단에는 헌법학회 전임 회장들과 김철수 교수 등 몇몇 공법학회장 출신이 포함돼 있다. 이분들이 최종 결정을 내릴 것이다. 합의가 안 되면 다수의견이라도 제시하고 정 안 되면 개헌 기준만이라도 제시할 것이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2월 말까지 개헌안을 마련해 3월에는 발의한다고 해서 바빠졌다. 그 전에 공개하겠다.”
“법제처를 중심으로 일부 위원을 위촉해 비공개로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몇몇 교수 이름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국회가 개헌안을 준비하고 있는 시점에서 청와대가 공개적으로 뭘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
5·18과 촛불은 전문 넣기 어렵다
―국회가 특권을 없애기는커녕 보좌관을 1명 더 늘리고 짬짜미 예산으로 뒷거래하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보면서 이런 국회에 개헌을 맡기는 것은 국회 권한만 늘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국회가 개헌안을 마련하면 국회에 유리하게, 국회가 정해진 시한까지 합의를 못 해서 대통령이 개헌안을 마련하면 대통령에게 유리하게 개헌안이 마련될 우려가 있다. 그래서 우리 헌법학자들이 중립적인 개헌안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국회가 얼마나 수용할지는 모르겠다. 최소한 국민이 국회의 개헌안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해 보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개헌과 관련해 ‘새 헌법 전문에 부마항쟁과 5·18광주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촛불 항쟁의 정신을 새겨야 한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한국은 미국과 달리 헌법 전문의 효력도 인정하고 있다. 국회 특위에서 헌법 전문과 관련해 어떤 논의가 이뤄지고 있나.
“6월 민주항쟁을 추가하자는 데는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5·18민주화운동을 넣는 데는 지역별 의견 편차가 너무 크다. 부마항쟁은 지역 간 균형을 맞추려고 5·18과 함께 내세운 듯한데 반응이 좀 그렇다. 촛불 시위에 대해서는 겨우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이어서 더 많은 숙고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무엇보다 우리 헌법에는 법치주의라는 말이 빠져 있다. ‘법치주의에 터 잡아’라는 말을 넣자는 데 거의 합의가 이뤄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결국 법치를 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지 않았나.”
―통치구조에서 특히 논의가 분분하다던데….
“혼합정부제(이원정부제)와 대통령 4년 중임제가 대립하고 있다. 혼합정부제는 외치(外治)는 대통령에게, 내치(內治)는 국무총리에게 맡기자는 투톱 시스템(two top system)이다. 그러나 외치와 내치를 구별해 통치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고 대통령제나 의원내각제와 달리 이원정부제는 헌법적 개념도 아니라는 반박이 있다. 대통령 4년 중임제는 국무총리와 위원에 대한 의회 통제를 강화하고 국가정보원 검경 국세청 등 권력기관 수장에 대한 대통령의 인사권을 제한하는 대신 현행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바꿔 국정 안정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혼합정부제가 다수의견이고 대통령 4년 중임제가 소수의견이다. 어떤 정부 형태를 택하든 대통령 결선투표제 도입과 대통령의 특별사면권 제한에는 합의가 이뤄졌다.”
더욱 강화된 경제민주화 조항
―대통령의 권한을 줄이면 국회의 권한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국민은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줄어든 권한이 국회로 가는 것도 선뜻 내키지 않아 한다.
“국회의 면책특권 불체포특권도 동시에 줄여야 한다. 개헌 결과 국회의원 수가 늘어난다면 그런 개헌에 국민이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이번 예산안 처리에서도 국회의원 보좌관 수를 늘려 국회를 보는 여론이 좋지 않다. 인구 비례로 보면 우리나라 국회의원 수가 외국보다 많은 편이다. 300명 이내로 돼 있는 국회의원 수를 250명 이내로 줄이는 등 국회도 고통을 분담한다는 모습을 보여야 개헌의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상원을 만들자는 논의도 있던데….
“헌법재판소가 2014년 선거구 간 인구 편차를 2 대 1까지만 허용했다. 1995년까지만 해도 편차가 4 대 1까지 허용됐는데 2001년 3 대 1로 줄더니 2 대 1까지 줄어들었다. 그 결과 시골 지역 이익을 대변할 의원 수가 줄고 있어 상원의 형태로 시골의 대표성을 강화해 도시와 시골 간 균형을 맞출 필요가 제기됐다. 더 나아가 통일이 된다면 인구 비례인 하원에서 열세인 북한 지역의 이익을 균형 있게 대변할 수 있는 상원의 필요성이 있다. 상원 신설에 자문위는 대체로 찬성하지만 현 국회의원의 권한을 축소시키는 것이어서 특위가 반대한다.”
―경제 분야는 어떠한가.
“시장경제보다 정부규제를 강화하는 안이 만들어지고 있다. 헌법 119조 2항의 중간 부분에 들어 있는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를 앞으로 끌어내고,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여’를 ‘경제력의 집중과 남용을 방지하여’로 확대하는 한편, ‘할 수 있다’라는 권고적인 동사를 ‘하여야 한다’는 강제적인 동사로 바꾸는 안이 다수의견으로 제시돼 있다. 여기에 더해 다수의견은 ‘국가는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집중과 남용의 피해자들에게 징벌적, 집단적 사법구제수단을 보장한다’는 119조 3항을 신설하는 안까지 제시했다. 이에 대해 경제에 대한 규제는 선택적으로 할 수 있어야지 이를 의무로 규정할 경우 시장경제의 근간을 해치고 계획경제라는 의혹을 야기할 수 있다는 소수의견의 반발이 있다.”
―각계의 헌법 개정 주문이 밀려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연방제 수준의 지방분권 개헌을 강조했다. 국민의당은 국회 표결에서 여당에 협조해주는 대가로 국회의원 선거구제를 1, 2당에 유리한 소선거구제에서 3당에 유리한 중대선거구로제로 개편하는 뒷거래를 하고 있다. 농협 등 농민단체는 헌법에 국가의 농업지원을 의무화하는 농업 조항의 신설을 요구하고 있다. 세종시는 수도 조항을 신설해 행정수도까지 못 박아 달라고 한다.
“지방분권에 대해서는 헌법 제1조에 집어넣자는 의견이 있다.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항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에 이어 3항을 신설해 지방분권을 넣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 헌법 제8장 지방자치편을 강화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반발이 있다. 선거구제 개편은 비례대표제 확대, 국회의원 증원 등이 선행돼야 한다. 너무 정략적으로 흐를 수 있어 이번 개헌에 포함시키면 개헌 자체를 물 건너가게 할 수 있다. 농민단체 측 요구대로 농업 조항을 따로 신설한다면 어업은 어업 조항, 중소기업은 중소기업 조항을 신설해 달라고 요구가 터져 나올 것이다. 수도 조항은 통일 후를 대비해야 하니까 미리 규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거대 문제를 방만하게 제시하기보다 그동안 노출된 구체적인 헌법적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할 것 아닌가. 가령 박 전 대통령의 탄핵 과정에서 60일 만의 재선거라든가, 부통령이 없는 권한대행제의 한계가 드러났다. 최근에는 헌법재판소장의 임기 문제도 다시 제기됐다.
“큰 틀이 정해지지 않아 그런 데까지는 손을 못 쓰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 해결이 중요
―헌법을 전면적으로 뜯어고치는 게 가능할까.
“일단은 개헌의 기회가 왔으니 헌법 전반을 검토하는 것이고 실제 가능한지는 다른 얘기다. 사안마다 의견이 분분하니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합의할 수 있는 선에서의 개헌으로 가지 않을까 싶고 결국은 원포인트(one point) 개헌이 될 수도 있다. 원포인트 개헌이 된다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을 줄이는 개헌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원포인트 개헌이라고 말하지만 그 의미도 명확하지 않다. 조항 하나만 바꿔 대통령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고치는 식은 가능하지 않은 듯하다.
“대통령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고친다면 달랑 그 조항 하나만 뜯어고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대통령의 권한이 변하는 데에 맞춰 국회와 사법부의 권한도 대거 조정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어디까지 조정을 해야 하는지 또 복잡한 논의가 필요하다.”
―이번에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을 없애는 데 집중하고 나머지 과제는 뒤로 돌리되 그 대신 헌법 개정의 경직성을 완화해서 앞으로 보다 자주 개정을 한다면 어떨까.
“현재 국회의 헌법 개정 정족수인 재적인원 3분의 2를 충족시키는 것은 한 당이 반대하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를 5분의 3으로 내리자는 의견도 나와 검토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헌법 개정하면 5공화국, 6공화국 식으로 공화국의 명칭을 바꾸는 전면적인 헌법 개정만 연상한다. 그렇다 보니 개헌을 너무 어렵게 여긴다. 프랑스나 독일처럼 비교적 잦은 헌법 개정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