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짓다’라는 말은, 밥이나 옷, 약, 집을 만드는 행위를 가리키지만 글을 만드는 일을 지칭하기도 한다. 시인이 ‘당신의 이름을 짓는’ 것은 바로 시를 쓰는 일을 가리키지만, 이어지는 문장은 ‘며칠은 먹었다’이다. ‘이름’이 ‘약’처럼 쓰였다. 아픈 그는 약을 먹듯, 글을 자기 안에 녹인다.
이 시에서 화자는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그는 그 모르는 사람이 ‘나’인 양 ‘자서전’을 쓴다. 그러다 보니 낯선 이의 자서전은 나의 일기처럼 쓰인다. 화자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가 되어 그 마음을 헤아리게 된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게 된 것은, 화자가 아프기 때문이다. 이 아픔은 당연히, 사랑의 아픔이다. 아픈 그가 필요한 것은 약이 아니라 당신이어서다. 화자와 사랑하는 이와의 만남은 아름답지 못했지만, 아마도 이별했겠지만, 화자는 낯선 이의 이야기와 화자의 일기와의 간격이 좁혀지고 아름답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