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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낙연 국무총리 “기자생활 21년, 내면 형성한 소중한 수업 기간이었다”

입력 | 2017-12-12 03:00:00

[나와 동아일보]<1> 이낙연 국무총리




《지령(紙齡) 3만 호를 이어오는 동안 동아일보는 굴곡의 역사 속에서 숱한 이들에게 때론 가슴 벅찬 영광을, 때론 가슴 시린 추억을 남겼다. 그들에게 동아일보는 무엇일까. 2020년 창간 100년을 넘어 4만 호, 5만 호 때는 동아일보가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길 기대하고 있을까. 오랜 시간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어온 각계각층 인사들의 ‘나와 동아일보’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



이낙연 국무총리가 1989년부터 3년 2개월 동안 동아일보 도쿄특파원을 지내던 시절의 모습(왼쪽 사진). 이 총리는 특파원을 마친 뒤 정치부 차장, 논설위원, 국제부장 등을 지냈다. 오른쪽 사진은 1982년 재직 당시 동아일보 사원증. 국무총리실 제공

내가 동아일보 기자가 된 것은 우연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행운이었다.

원래 나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 대학도 법과를 선택했다. 그러나 법학은 답답했다. 더구나 아버지는 내 하숙비를 보내지 못하셨다. 선배나 친구의 하숙집과 자취방을 전전하며 나는 지쳐 갔다. 영양실조에 빠졌다. 177cm의 키에 체중이 50kg을 밑돌기도 했다. 징집영장이 반가웠다. 졸업식을 1주일 앞두고 입대했다. 대학 졸업 앨범에는 시신 같은 내 얼굴 사진이 실렸다.

제대 후에 나는 투자신탁회사에 취직했다. 월급은 좋았다. 그러나 생소했다. 친구들은 만날 때마다 내 회사 이름을 다시 물었다. 그것이 나는 싫었다. 그 무렵 동아일보의 채용광고를 보았다. 나는 기자가 됐다.

나의 기자 생활은 거대한 낙종으로 시작했다. 1979년 10월 8일이었던가. 나는 ‘수습기자’에서 ‘수습’을 뗐다. 얼마 되지 않아 10·26이 터졌다. 그것을 정부 대변인 문공부 장관이 발표했다. 내 업무였다. 총리실 통일부 문공부 총무처를 포함하는 ‘중앙청’이 나의 첫 출입처였다. 그러나 나는 연락을 받지 못했다. 나는 전화가 없는 누나 집에 얹혀살고 있었다. 출근해 보니 호외가 나와 있었다.


1979년 12월 12일 해질녘. 여관에 들었다. 국무총리공관 정문 앞 삼청여관 2층(지금은 카페). 대통령권한대행 최규하 총리의 내각 구성을 취재해야 했다. 나는 총리공관을 드나드는 차량 번호라도 파악하고 싶었다.

갑자기 소대 규모의 군인들이 총리공관 정문을 에워쌌다. 나는 여관 밖으로 나가 현장 지휘관에게 사유를 물었다. 소령은 “훈련 중입니다. 들어가세요” 하고 대답했다. 정치부 데스크에 전화로 보고했다. 남중구 차장은 “여기도 들어왔어요. 철수하세요”라고 하셨다. 내가 겪은 12·12였다.

1989년 여름. 나는 도쿄특파원에 내정됐다. 같은 시기에 김대중 평민당 총재 측은 내 고향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를 내보내려 했다. 국회의원의 밀입북 이후였다. 김 총재 측근들이 나에게 그것을 알려주었다. 나는 사양했다. 나는 국회의원보다 특파원이 더 하고 싶었다. 그 기회를 놓치면 나는 무식쟁이가 될 것 같았다. 3년 2개월 동안 나는 일본을 경험했고, 세계를 짐작했다. 내 선택은 옳았다고 지금도 믿는다. 2000년에 나는 국회의원이 됐다.

스물여덟부터 마흔아홉까지. 인생의 한복판을 나는 동아일보 기자로 살았다.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첫째, 진실을 알기는 몹시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전두환 정부의 금융실명제 연기처럼 굵은 특종을 곧잘 했다. 그러나 공천 탈락 예상자를 잘못 보도해 여러 정치인들께 상처를, 유권자들께 혼란을 드렸다. 다른 오보도 적지 않았다. 특종보다 오보가 나에게 더 깊은 교훈을 남겼다. 지금도 나는 진실에 신중하다.

둘째, 어느 경우에나 공정해야 한다는 것을 철칙으로 익혔다. 나는 국회의원에게 폭행을 당했다. 내 기사가 싫었던 의원은 의사당 안에서 나에게 주먹질을 했다. 나는 그것을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 그 대신 동료 기자에게 조용히 부탁했다. “앞으로 그 의원 기사는 자네가 써주게. 나는 공정할 자신이 없네.” 나는 공정을 내 브랜드로 삼고 싶어 한다.

셋째, 말과 글은 알기 쉬워야 하며, 그러려면 평범하고 명료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겼다. 김중배 편집국장은 논어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을 가르쳐 주셨다. 꾸미지 말고 있는 대로 쓰라는 뜻으로 들었다. 이것을 나는 지금도 훈련한다.

넷째,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터득했다. 인생과 자연의 비밀은 너무 많고, 세상의 변화는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일주일에 하루는 책을 읽으려 노력한다.

동아일보 기자 21년. 많이 일했고, 많이 마셨다. 괴로운 날도 많았다. 그래도 좋은 시절이었다. 나의 내면을 형성한 소중한 수업 기간이었다. 동아일보가 곧 지령 3만 호를 맞는다. 그 가운데는 내 청춘의 흔적도 서려 있다. 동아일보의 분발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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