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외교 당국자들은 ‘핵보유국 선언’을 예고한 행보로 보고 있다. 내년 신년사 때 김정은이 직접 선언할 거란 관측이다. 최근 만난 조지프 디트라니 전 6자회담 미국 차석대표는 “핵 완성 선언은 북한이 미국과 대화할 준비가 됐다는 의미”라며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핵 폐기를 전제로 한 대화만 하겠다고 했지만 실제 만남이 성사되려면 그보다 낮은 단계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현실적 고민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사일 기술을 완성한 뒤 3개월 내 미 본토 전역을 타격권에 둘 경우 대화 주도권은 북한이 쥔다. 핵 보유를 선언한 뒤엔 강력해질 공갈포를 트럼프는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핵 리스크는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에게 정치적 재앙이다.
김정은이 원하는 건 뭘까. 워싱턴의 한 외교소식통은 “북한은 미국과의 전략균형을 주장하며 체제 보장을 위한 북-미 수교와 상호불가침조약, 주한미군 철수, 대북제재 철회를 요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술이 없었을 때인 2005년 9·19 공동성명에서도 북한은 핵 프로그램 포기 약속만으로 체제 보장과 중유 및 전기 공급을 얻어냈다.
미국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주한미군 철수도 없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말을 다 믿을 순 없다. 트럼프를 당선시킨 ‘신고립주의 공약’을 대입하면 북-미 간 빅딜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핵 전문가인 비핀 나랑 매사추세츠공대(MIT) 정치학과 교수는 e메일 대화에서 “트럼프가 이란 핵협정 재인증을 거부한 것은 김정은에게 ‘미국을 믿지 말라’는 메시지가 될 것”이라며 “북한은 핵 폐기를 거부하면서 대신 군축이나 상호불가침으로 협상을 유도하는 전략을 쓸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화학무기를 만들던 리비아와 단교한 뒤 2006년 관계를 정상화할 때 원하는 대부분을 얻어냈다. 하지만 핵을 든 김정은은 다르다. 핵탄두 소형화와 캐리어(carrier)까지 완성하면 한반도 평화를 명분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관철시키려 들 것이다. 트럼프가 현실적 해법을 찾는다며 미군 철수에 불가침조약이라도 맺는 날엔 우린 그날로 적화(赤化)의 바람 앞에 놓이게 된다.
7세기 중반 신라는 멸망 위기까지 몰리다 당나라와의 연합으로 통일 왕조를 세웠다. 북한 역시 한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떨어지면 중국과 연대해 10대 경제 강국인 대한민국을 통째로 먹으려 할 것이다. 김정은이 추운 겨울에 힘들게 백두산 정상까지 찾은 건 이런 결기를 다지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민족의 영산에서 조국의 통일을 꿈꾼 그의 독기와 집념이 무섭게 다가오는 세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