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25개국 ‘안보협력체제’ 합의 테러-러 위협 대응 위해 속도… EU군대 창설 사전 단계 돌입 2조원 규모 방위기금도 마련… 융커 “잠자는 숲속 공주 깨어났다” 獨-佛 주도권 줄다리기 등 변수
《 유럽연합(EU) 25개국이 그동안 봉인돼 있던 국방 통합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11일 EU 외교장관들은 안보·국방협력체제(PESCO) 출범에 서명하고 의료 부대 창설, 신무기 공동 개발 등 17개 구체적인 공동 국방 프로젝트에 착수하기로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국방비 증액 요구에 대응해 점차 미국의 안보 우산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가 가시화된 이번 행보는 EU 공동 군대를 만들기 위한 첫걸음으로 평가된다. PESCO 출범 배경과 전망을 살펴본다. 》
장클로드 융커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11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25개국 EU 외교장관들이 새로운 합동 방위 체계로서 안보·국방협력체제(PESCO)의 구축에 서명한 뒤 이렇게 말했다. EU의 ‘미니 헌법’ 격인 리스본 조약 42조에는 안보와 국방 정책 통합에 대한 규정이 포함돼 있지만, 각 나라의 주권과 직결되는 민감한 국방 협력은 그동안 EU 통합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이번 서명으로 EU는 독자적인 군대 창설을 위한 사전 단계에 돌입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날 공식 합의한 1차 17개 공동 국방 프로젝트에는 각국이 함께 연구하고 훈련하자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 의료부대 창설, 보병 장갑차 공동 개발 같은 무기 및 병력과 관련된 구체적인 계획이 포함됐다. 항구 및 해양 감시 체제 구축, 군사물자 허브화 등 전투의 핵심 개념인 작전 수행과 관련된 내용도 담겨 있다.
EU가 PESCO를 출범시킨 가장 큰 이유는 각국이 다른 국방체계를 갖고 있어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판단 때문이다. 영국을 제외한 EU 27개국의 평균 국방예산은 전체 예산의 1.3%에 불과할 정도로 적다. 더 큰 문제는 국방비로 미국의 절반을 쓰는 데 비해 효율성은 미국의 15%밖에 안 된다는 점이다. 이는 제각각인 178개의 무기 시스템 탓이 크다. 예를 들어 전투 장갑차의 경우 미국은 한 개의 모델로 운영되는 반면 EU는 17개의 다른 시스템으로 구축돼 있어 상호 협력에 장애가 된다. 동유럽을 중심으로 추진 중인 유럽 내에서 병력과 군사 장비가 자유롭게 오가는 이른바 ‘군사 솅겐 조약’을 현실화하는 데도 필요한 절차다.
이번 프로젝트가 더 힘을 받는 건 ‘실탄’인 돈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12일 EU는 연간 15억 유로(약 1조9350억 원)에 이르는 유럽방위기금을 마련하는 방안에도 서명할 계획이다. 이 금액은 2020년 이후 매년 50억 유로 규모로 늘어난다.
EU 집행부의 꿈은 크다. 융커 위원장은 2025년까지 EU 국방연합체 창설을 목표로 하고 있고, 도날트 투스크 EU 상임의장은 최대한 빨리 EU 국경을 EU 공동군이 통제하기를 바라고 있다. 독일 제1야당인 사회민주당을 비롯해 친EU 통합론자들은 2025년 EU 연방 체제 구축을 위해서도 EU 국방 통합에 적극적이다.
서유럽과 동유럽의 온도 차도 관건이다. 17개 프로젝트 중 4개는 독일, 4개는 이탈리아, 2개는 프랑스가 주도하도록 하는 등 대부분 서유럽 주도로 진행되고 있지만 정작 러시아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 건 동유럽이다.
국방 부담을 덜게 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는 PESCO 창설에 환영하고 있지만 결국 EU 군대 창설로 이어질 경우 나토로부터 홀로서기가 불가피해진다. 나토 및 미국과의 관계도 풀어야 할 숙제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