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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운수 좋은 날’ 인력거꾼 김첨지는 한달에 얼마 벌었을까

입력 | 2017-12-13 03:00:00

일제강점기 인력거꾼 생활상 조명




일제강점기 인력거와 이를 모는 인력거꾼. 구글 화면 캡처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김첨지에게는 오래간만에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앞집 마나님을 전찻길까지 모셔다 드리고, 양복장이를 동광학교까지 태워다 주기로 했다.”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의 주인공 김첨지는 인력거를 끌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 “첫 번에 30전, 둘째 번에 50전… 아침 댓바람에 그리 흔치 않은 일”처럼 운 좋게도 수입이 많은 날도 있었다. 그러나 1925년 조선총독부의 통계에 따르면 이들의 한 달 수입은 30원가량이었다. 30원은 총독부가 빈민을 나누는 기준으로 사용한 금액으로, 이들의 경제적 상황이 열악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인력거꾼들의 생활상을 조명한 이색적인 연구가 나왔다. 염진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원이 최근 서울역사편찬원이 주최한 ‘서울과 역사’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일제하 인력거꾼 노동조합의 결성과 활동’이란 논문이다.

논문을 통해 본 1920년대 경성의 도로는 운수 사업자 간에 치열한 손님 쟁탈전이 펼쳐지는 전쟁터였다. 1925년 처음으로 택시회사가 설립됐고 1928년 버스사업이 인가되면서 5전이라는 파격적인 요금이 제시되자 인력거꾼들은 공황에 빠지기도 했다. 당시 인력거 요금은 단거리의 경우 5정보(약 500m)에 15전, 장거리는 1리(약 4km)에 60전이 기준이었다.

민족적 차별 역시 심했다. 일본인 인력거꾼이 수입의 30%가량을 사납금으로 냈던 것에 비해 조선인은 40%를 내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인력거꾼이 빼어든 카드는 노동조합이었다. 1922년 사납금 제도 개선 등을 위한 동맹파업을 벌였다. 교통운수업 종사자가 벌인 첫 집단행동이라는 평가다. 또 소비조합을 결성해 생필품을 공동 구매하고 조합 운영자금을 조달했다. 여기서 생긴 수입으로 1925년 대홍수 때 수재민을 위해 음식을 기부하고 1929년 경상도 일대에서 대기근이 벌어지자 위로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염 연구원은 “인력꾼들은 자녀 교육을 위해 공동으로 ‘대동학교’를 설립하는 등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펼쳤다”며 “단순히 자동차에 밀린 도시 빈민이 아닌 다양한 면모를 가진 이들의 모습이 조명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