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칼날 앞에 선 국가정보원. 동아일보DB
이형삼 전문기자
이명박 정부 초기, 그가 느닷없이 국정원 감찰실로 소환되면서 운명이 뒤틀렸다. 그 무렵 한 시사지에 국정원 수뇌부의 조직 장악력 논란을 분석한 기사가 실렸다. 국정원장과 기획조정실장 간의 알력, 여권의 국정원 개편 구상 등 휘발성 높은 소재를 다뤘다. 보도 직후 국정원은 취재원 색출을 위해 직원들의 휴대전화 통화 기록을 뒤졌고, 취재기자와 인연이 닿는 직원들을 모두 불러 조사했다. 그중에 A 씨도 끼여 있었다.
국정원은 감찰 끝에 A 씨를 해임했다. 기자 접촉 및 대화, 허가 없이 외부 칼럼 게재, 대학 무단 출강 등이 징계 사유였다. A 씨에 따르면, 기자와 접촉한 사실 외에는 “모든 책임을 지고 조용히 나가 달라”는 국정원의 요구에 불응한 뒤 추가된 사유다. 중징계를 위한 명분 쌓기였으나 어느 것도 해임까지 갈 사안은 아니었다고 한다.
봉급이 끊긴 데다 국정원 근속연수가 20년에 조금 못 미쳐 공무원연금도 못 받게 됐다. 부정기적인 강연과 방송 출연 등으로 생계를 이었다. 그는 “퇴사 후 지금껏 백화점에 뭘 사러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정부 산하 통일 관련 기관장에 몇 차례 지원했으나 번번이 막판에 국정원 해임 이력이 발목을 잡았다. 20년 가까이 새벽 5시에 출근하면서 조직에 충성한 대가는 혹독했다.
그런 A 씨가 최근의 국정원 사태를 지켜보는 눈길에는 애증(愛憎)이 함께한다. 전직 원장들이 피의자 신세로 전락하며 국정원이 ‘적폐 청산’의 칼날 앞에 선 데 대해선 “올 것이 왔다”고 본다. 국정원의 변화와 개혁은 시대적 요청이라는 것이다.
그는 북한의 국정원 격인 국가보위성을 국정원에 빗댔다. 공교롭게 국가보위성도 요즘 수난을 겪고 있다. 보위성이 주민들을 강압하고 당 간부를 고문하는 등 월권행위를 일삼다가 김정은의 ‘개인교사’였던 김원홍 보위상이 숙청되고 몇몇 간부가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원홍의 전임 보위상들도 비슷한 이유로 험한 말로를 맞았다. A 씨는 “남북한 정보기관들이 정도의 차이는 크지만 최고지도자의 비위와 부정을 방조하며 과잉 충성하다가 역풍을 맞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남과 북의 정보기관 적폐 청산 방법론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보위성은 상층부만 쳐냈다. 근간은 건드리지 않았다. 대남 공작, 첩보 스파이전(戰), 사이버테러, 사이버 선전·선동 등 북한 정보기관들의 활동 영역은 오히려 방만하다 싶을 정도로 팽창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국정원 개혁이 자칫 급속한 다운사이징으로 흐르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부작용을 낳은 시스템은 손보더라도 조직을 무너뜨리고 조직원들의 자존심에 상처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내가 근무할 때나 지금이나 국정원 일각엔 제 식구 때려잡는 걸 훈장처럼 여기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국정원이 축적한 역량은 소중한 자산이다. 북한, 중국발(發) 정보전쟁 쓰나미에 맞설 방파제를 견고하게 증축해야 할 시점에 그나마 쌓아놓은 것마저 헐어내선 안 된다.”
이형삼 전문기자 han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