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현·산업부
2016년 12월 6일 국회에서 열린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에서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작심한 듯 이같이 말했다. 다른 총수들이 대부분 ‘기억나지 않는다’,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할 때 재계 고참으로서 꺼낸 소신 발언이었다.
이 발언이 1년여 만인 13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항소심 재판에서 재조명됐다. 이 부회장의 변호인단은 “기업인들에 대한 대통령의 요청은 사실상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며 구 회장의 증언을 인용했다. 구 회장의 얘기대로 “(정부 요청은) 이미 수락으로 결정돼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 이 (국정 농단) 사건에서 충분히 고려돼야 한다”며 “이게 기업인 모두의 심정”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LG도 기다렸다는 듯 “내년 신산업 분야를 중심으로 19조 원을 투자하고, 1만 명을 채용하겠다”고 답했다. 상생협력 기금으로 8581억 원을 만들고 그중에서 1862억 원은 무이자로 운용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물론 정부와 기업 간 대화는 자주 이뤄질수록 바람직하다. LG가 이날 약속한 일자리 창출과 중소기업과의 상생 역시 기업이 사회적 책임의 하나로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분야다. 문제는 그 방식이다. 기업이 자발적으로 하려던 것도 관(官)에서 주도해 기업에 ‘숙제’를 던지고 기업이 마지못해 ‘화답’하는 식으로 진행된다면 지금의 방식이 과연 지난 ‘적폐’ 정부와 뭐가 달라진 건지 궁금하다.
무엇보다 이날 LG 경영진이 “기업의 투자 및 사업 과정에서의 애로 사항에 대해 협조해 달라”고 건의한 데 대해 정부 측은 속 시원한 약속을 하지 않았다. 이날 오후 기재부가 발표한 6페이지짜리 보도자료에도 이에 대한 답은 한 줄도 없었다. ‘현장소통 간담회’라는 이름으로 열린 이날 자리가 과연 기업에도 소통의 장이었는지 의문이다. 1년 전 이맘때 구 회장이 국회에서 용기 내 했던 하소연이 새삼 절절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김지현·산업부 jhk8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