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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치료 시대 개막… 인체 내 면역세포 도와 암세포 잡는다

입력 | 2017-12-15 03:00:00

[과학&기술의 최전선/바이오의약]<3> 암 치료의 새 흐름, 면역 치료




혈관 안을 떠다니는 면역세포(T세포, 크고 둥근 세포)와 면역관문억제제(면역세포 옆 작은 물질)를 묘사한 그림. 면역관문억제제는 면역세포를 억제하는 암세포의 기능을 무력화시켜 면역세포를 돕는다.

인체가 가진 면역세포 또는 면역물질의 힘을 키워 암을 고치는 차세대 항암제인 면역치료제 개발이 활발하다. 9∼12일(현지 시간)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제59회 미국혈액학회 연례총회는 면역치료제가 암 연구의 주요 흐름임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었다.

유전자를 염기 단위로 교정할 수 있는 일명 유전자 가위의 원천기술을 보유한 기업 툴젠은 이곳에서 자사 ‘크리스퍼/캐스9’ 기술을 이용해 면역항암치료제의 효과를 높인 동물실험 결과를 소개했다. 툴젠만이 아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 암센터와 펜실베이니아대 연구팀도 역시 총회에서 면역치료제와 관련된 임상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미국혈액학회는 총회 기간 중 서로 다른 면역치료제 연구 결과 세 건을 묶어서 홍보하기도 했다. 김석중 툴젠 이사는 “몇 해 전부터 면역치료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돼 왔다”며 “이번 학회의 분위기는 예견됐던 것”이라고 말했다.


암 연구의 최전선에 있는 과학자들이 면역치료제에 주목하는 것은 최근의 잇단 성과들 때문이다. 이호준 미국 스탠퍼드대 의대 연구교수는 “면역치료제 개발이 계속 난항을 겪어왔는데 최근 일부 치료제가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으면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며 “수술과 화학요법, 방사선치료를 1세대 항암치료, 암세포를 찾아 죽이는 표적치료를 2세대 항암치료라고 한다면 면역치료는 3세대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면역치료제는 쉽게 이야기하면 원래 암세포를 잡는 능력을 가진 면역세포의 능력을 더 키워 암세포를 죽이도록 하는 치료제다. ‘범인’인 암세포 자체를 약화시키거나 직접 파괴하는 게 기존의 1, 2세대 항암치료제였다면, ‘경찰’에 해당하는 인체 내 면역세포를 도와 암세포의 ‘체포율’을 높이는 것이 면역치료제다.

면역세포(왼쪽)와 암세포(오른쪽)가 결합한 모습을 나타낸 그림. 암세포는 면역세포와 결합함으로써 면역세포의 기능을 떨어뜨리는데, 면역관문억제제가 그 과정을 방해해 암 퇴치를 돕는다. 네덜란드암연구소 제공

암세포를 체포하기 위해 면역치료제가 취하는 전략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암세포의 기능을 떨어뜨리고, 이를 통해 상대적으로 우위에 선 면역세포가 암세포를 쉽게 죽이게 만드는 전략이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치료제가 바로 이 새로운 방식의 항체치료로, ‘면역관문억제제’라고 부른다.

면역관문억제제는 암세포가 갖고 있는 능력 가운데 경찰을 피해 도망가는 능력, 즉 면역세포 회피 기능을 억제해 체포율을 높인다. 비유하자면 암은 면역세포의 눈에 해당하는 부위에 일종의 안대를 씌워 자신을 보지 못하게 만든 뒤 유유히 피해가는 능력이 있다. 눈이 가려진 면역세포는 바로 앞에 있는 암세포도 보지 못해 놓친다. 결과적으로 암의 진행을 막지 못한다. 면역관문억제제는 암세포의 손을 묶어 안대를 씌우지 못하게 막는 식으로 경찰인 면역세포의 체포를 돕는다.

이 방식으로 처음 FDA의 정식 판매 승인을 받은 치료제는 2011년 시판을 시작한 흑색종(피부암) 치료제 ‘이필리무맙’(상표명 예르보이)이다. 버네사 허버드루시 미국 암연구소 교수는 7일 ‘유럽종양학회지’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필리무맙의 개발은 면역항암치료제의 풍경을 완전히 바꿨다”고 평가했다. 이 치료제는 CTLA-4라는 암의 회피 단백질을 억제해 면역세포의 체포 효율을 높인다. 이후 비슷한 방식의 치료제가 연이어 나왔다. 암세포가 면역세포를 억제할 때 사용하는 PD-1이라는 단백질을 억제하는 ‘니볼루맙’(상표명 오프디보)이 2014년 FDA의 승인을 받았다. PD-1 계열 억제치료제는 최근 면역치료제 분야의 베스트셀러로, 지난 3년 사이에만 4개의 치료제가 추가로 개발돼 FDA의 승인을 받았다.

인간의 면역세포 중 하나인 T세포. 3세대 항암치료제인 면역치료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진 출처 미국국립보건원 국립알레르기및감염병연구소

면역치료제가 갖는 두 번째 전략은 면역세포 자체의 힘을 키우는 방식이다. 이 전략은 최근 다른 생명과학 기술과 결합하며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최근 가장 큰 화제를 낳은 사례는 유전자치료제와의 결합이다. ‘키메라항원수용체(CAR)-T세포치료제’라고 부르는 이 치료제는 유전자 조작으로 암세포를 잡는 ‘센서’를 면역세포에 추가해 탐지 능력을 높인 게 특징이다. 경찰에게 적외선 탐지장치를 쥐여준 것과 비슷하다. 올해 FDA의 승인을 받은 노바티스와 길리어드의 혈액암 유전자치료제 킴라이아와 예스카르타가 대표적인 예다. 이현숙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기술적으로는 유전자치료제로, 치료 원리로는 면역항암치료제로 분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크리스퍼와의 결합은 면역치료제의 기능을 한층 강화했다. 툴젠은 CAR-T세포치료제에서 면역세포가 치료 효과를 떨어뜨리는 일종의 방해효소를 만든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래서 이 효소를 만드는 유전자를 크리스퍼를 이용해 교정해 암 치료 효율을 높였다. 김석중 소장은 “기존 CAR-T세포치료제가 키메라항원수용체를 개발해 면역세포에 (추가로) 붙인 것이었다면, 이제는 면역세포 내부를 바꿔 기능을 개선하는 데 눈을 돌리고 있다”고 말했다.

게놈 해독과 결합해 개인맞춤형 암 백신을 만드는 연구도 진행 중이다. 암 백신은 게놈 해독을 통해 개개인의 암 특성을 파악한 뒤 여기에 맞춰 효능을 높인 면역치료제다. 이호준 교수는 “암세포는 체세포 돌연변이에 의해 정상세포에는 없는 (후천적) 돌연변이를 지닌다”며 “특수한 통계적 기법을 활용한 게놈 해독 기술로 이 돌연변이를 파악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허버드루시 교수에 따르면, 올해 9월까지 승인된 면역치료제는 면역관문억제제 6개를 포함해 모두 26개다. 임상시험 중인 약은 940개이고 전임상 단계의 약도 1064개에 이른다. 최근 면역관문치료제가 인기를 얻자 이들에 연구가 쏠리면서 여러 치료법을 조합한 병행치료 역시 많이 시도되고 있다. 허버드루시 교수는 이것이 일부 인기 치료제에 몰리는 과도한 중복 연구라고 비판했다. 면역치료제의 한계를 분명히 직시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현숙 교수는 “최근 성과가 많이 나면서 많은 연구가 면역관문억제제 분야로 몰리고 있는데, 아직은 환자 일부에서만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며 “암은 복잡한 현상인 만큼 금방 만병통치약이 나올 것처럼 믿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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