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봉화군의 ‘이몽룡 생가’ 계서당(溪西堂). 중요민속자료 제171호인 이 집 주인은 조선 중기 문신 계서 성이성(1595~1664) 선생. 그는 많은 학자가 소설 ‘춘향전’ 속 이몽룡의 실제 모델로 추정하는 인물이다. 봉화=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저는 소설이 아니라 개룡남(개천에서 용이 된 남자)의 자기계발서로 바꾸고 싶어요. 갈수록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고 말이 많잖아요? 이몽룡은 딱 개천에서 용이 된 남자죠. 지금은 소설보다 자기계발서가 훨씬 더 잘 팔리는 시대니까 소설보다 자기계발서가 나을 것 같아요.”
“저는 춘향이가 이몽룡을 기다린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장원급제를 지금으로 따지면 행정고시 수석 합격 아닌가요? 이미 행정고시 합격한 변 사또가 내가 좋다는데 몇 년씩 연락이 오지 않는 구 남친(옛날 남자친구)을 기다리는 건 지금 시대하고 맞지 않아요. 이몽룡이 춘향이를 정말 사랑한다면 변 사또에게 갔다가 돌아가도 받아주지 않을까요?”
당시 출제 과정에서 많고 많은 소설 작품 중 하필 ‘춘향전’을 고른 건 이 작품이 동아일보와 인연이 깊었기 때문. 동아일보는 1924년 오늘(12월 18일)자에 ‘춘향전 개작(改作)’ 현상공모 사고(社告)를 내보냈다. 응모 조건은 “시대, 인물 등을 일절 수의(隨意)로 개작하되 재래 춘향전의 경위를 손상치 말 것.”
1924년 12월 18일자 지면
당시 1등 상금은 500원. 현재 돈으로 약 325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2등에는 200원, 3등(3명)에는 100원 등 총 1000원이 각각 상금으로 걸려 있었다. 당시 신문사 주최 공모전 상금은 보통 몇 십 원이 기본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물론 많지 못한 현상(상금)이지만 이만한 것도 조선 신문계에서는 처음이라 자랑이 아닌 것도 아니외다”라고 썼다.
동아일보에서 신춘문예를 사고를 처음 내보낸 게 이듬해(1925년) 1월 2일자였으니까 신춘문예보다 춘향전 개작 공모가 빨랐다. 신춘문예 소설 1등 상금도 50원으로 춘향전 개작 공모보다 적었다. (참고로 2018년 신춘문예 중편소설 상금은 3000만 원이다.) 동아일보가 이렇게 춘향전에 천착했던 이유는 뭘까.
그러면 동아일보에서 공모한 춘향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정답은 없다. 당선작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1925년 9월 24일 사고에서 “본사에서는 1000원의 상금(그리 많은 것은 아니나)을 걸고 춘향전의 개작을 모집하였더니 수십 편이나 되는 힘들인 원고를 얻었으나 불행히 국민 문학으로 추천할 만한 것이 없음으로 응모하신 여러분께는 심히 미안한 일이나 춘원 이광수 씨에게 청하여 춘향전을 쓰기로 하였다”고 발표했다.
1925년 9월 24일자 지면
이후 동아일보는 ‘일설(一說)춘향전’을 그해 9월 30일부터 1926년 1월 3일까지 총 96회에 걸쳐 연재했다.
1924년 9월 30일자 지면
동아일보는 이와 함께 국문학자 김태준 선생(1905~49)의 ‘춘향전의 현대적 해석’이라는 논문을 1935년 1월 신년호부터 8일까지 연재하기도 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