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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진단]떡잎은 보호받아야 한다

입력 | 2017-12-18 03:00:00


허진석 산업부 차장

“나는 사업을 잘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계속 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하는 기업인이 있다면 사람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식자(識者)는 자본주의와 경영의 냉혹함을 얘기하며 그 실현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고, 대중(大衆)은 그 실천을 보지 못하니 그 말의 진정성 자체를 의심할지 모른다.

요즘 대학가(大學街)는 장학금 신청의 계절이다. 얼마 전 한국장학재단이 내년 1학기 국가장학금 신청을 마감했다. 16일 서울 강서구의 송원김영환장학재단에서도 내년 신규 장학생을 뽑는 면접이 있었다. 장학회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눈여겨볼 스토리가 있는 곳이다.

우선 장학금 지원 기준이 유독 고학생에게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낮에는 공장을 다니고, 건빵으로 끼니를 때우며 9남매 형제들을 돌보며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지금은 고인이 된 재단 설립자의 경험 때문이다. 송원그룹 창업주인 고 김영환 회장은 창업 3년 뒤인 1977년부터 당시 중소기업으로서는 드물게 사내 장학금을 마련했고 9년이 되는 1983년에 지금의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한 번 선발이 되면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는 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학생들에게 연간 1000만 원을 지원한다. 조건 없이 대학원까지 지원한다. 주거지가 없으면 기숙사를 제공한다. 이는 모두 ‘나처럼 고생하며 공부하는 학생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설립자의 바람이 실현된 결과다.

면접장은 가끔 눈물바다가 된다. 자기소개서에는 차마 적지 못한 어려운 사연을 털어놓다가 벌어지는 일이다. 아버지의 오랜 가출로 인해 근로소득원천징수영수증 등 서류를 제출하지 못해 국가장학금을 신청조차 못한 학생이 발견돼 선발되기도 했다. 16일 면접에서는 옆자리 학생의 딱한 처지를 듣고 자신은 장학금을 양보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학생도 있었다. 이 장학회는 2013년 30주년이 되기 전까지 장학회 활동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설립자가 살아계실 때는 장학금 증서 수여식도 갖지 않고 통장으로 조용히 학비를 보냈다.

고인은 생전에 “떡잎은 보호받아야 한다”며 장학사업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다. 이렇다 보니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때 장학금을 오히려 더 지급하는 용단도 내릴 수 있었다. 장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투명한 경영을 지향했고, 주변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세무조사를 나왔던 담당자의 추천으로 2005년 재정경제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 장학회는 다만 장학생들이 서로 알고 지내기를 원해서 매년 졸업한 회원의 가족까지 참여하는 수련회를 간다. 나중에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때도 힘을 합쳐 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다른 여러 장학재단도 훌륭한 정신을 바탕으로 운영되고 있을 것이다. 삼성 같은 대기업이 운영하는 곳은 물론이고 중소·중견기업들이 운영하는 곳도 적지 않다.

요즘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은 더 절실해 보인다.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는 흐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 놓고 낭만을 즐긴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하는 듯하다. 해가 갈수록 면접에 응하는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공부할 시간을 뺏기는 것을 안타까워한다고 한다.

소득 불평등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소식도 드물다. 겨울 한파 속에서 얼마나 많은 젊은이가 다음 학기 학비와 생활비를 걱정하고 있을지 걱정스럽다. 학생이 최소한 대출을 안고 사회에 진출하지는 않도록 기업의 장학재단 참여가 더 늘기를 고대한다.

허진석 산업부 차장 jameshu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