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화족(華族)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결혼한 조선 덕혜옹주. 동아일보DB
그리고 그때도 지금처럼 모든 부부가 화목한 건 아니었다. 1924년 오늘(12월 19일)자 동아일보는 서울 용산경찰서에 도움을 청한 ‘꽃 같은 젊은 조선 여자’ 김매향 씨 사연을 다뤘다.
1924년 12월 19일자
당시 동아일보는 “(남편이) 금수(禽獸) 같은 성욕을 마음대로 채우지 못하는 때는 무시로 구타하는 등 참기 어려운 고통은 날이 지날수록 커져 매향 씨가 여러 차례 집에서 도망쳤지만 그때마다 남편이 찾아 와 ‘같이 살지 않으면 너 죽고 나도 죽겠다’고 협박하기 때문에 용산서에 보호를 요청하려고 찾아왔다”고 전했다.
이번에도 남편은 경찰서 안에까지 찾아와 매향 씨를 때렸다. 결국 경찰은 남편을 경찰서에 가두는 검속(檢束) 처분을 내리고 매향 씨는 돌려보냈다.
이렇게 남편이 조선인이라고 속아 넘어간 건 매향 씨뿐만이 아니었다. 이로부터 보름 전(1924년 12월 4일자) 동아일보는 역시 19세였던 김도용 씨의 억울함을 전하고 있다.
1924년 12월 4일자
문제는 이 중매쟁이가 사기 혐의로 경찰에 덜미가 잡히면서 발생했다. 두 사람 결혼 생활이 파탄을 맞자 야마자키 씨가 ‘결혼 비용 20원을 돌려 달라’며 도용 씨를 상대로 경성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것. 당시 동아일보는 “정조는 유린하도 혼수비를 청구(했다)”며 야마자키 씨를 비판했다.
그렇다고 모든 조선인-일본인 부부가 이렇게 우여곡절을 경험한 건 아니다. 단, 이렇게 결혼한 부부는 남편이 조선인일 때도 자녀는 ‘일본인 같이 자라도록’ 일본 이름을 붙이는 등 일본식으로 키우는 게 일반적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문화사’)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