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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하얀설탕’ 인기… 구충제 광고 1990년대까지 실려

입력 | 2017-12-19 03:00:00

[광고로 본 東亞]<上> 한국인의 생활 변화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호에는 한국에서가장 오래된 기업 중 하나인 ‘박승직상점’의 창간 축하광고가 실렸다. 이 상점은 두산의 모태(母胎)다. 신문 기사들이 지난 세기 동안 일어난 일을 기록한 ‘대한민국 실록’이라면 지면 광고는 기업 성장사와 시대의 변화상을 담은 스냅 사진과 같다. 특히 광고를 통해 성장한 기업들은 국민들의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일등 공신이었다. 1953년 66달러(약 7만2000원)였던 1인당 국민소득은 이제 3만 달러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광고에 담긴 한국의 사회, 경제, 문화 성장사를 3회 시리즈로 보도한다. 》



‘文化人(문화인)은 年二回(연 2회) 寄生(충,훼)(기생충)을 驅除(구제)합니다.’

1960년 10월 13일 동아일보 2면에 실린 광고 문구다. 유한양행의 구충제 ‘유피라진 시렆’(당시 표기) 광고다. 구충제는 당시 국민들이 반드시 먹어야 하는 약이었다. 그해 4월과 5월 실린 서울약품의 ‘디게시나’ 광고는 ‘전 국민의 90% 이상이 기생충병 환자!’라고 적었다.

기생충약 광고는 1990년대 중반에 와서야 자취를 감춘다. 1930∼1950년대 의약품 광고의 주류를 이뤘던 성병약은 1970년대 이후 찾아보기 힘들다. 국민 건강 수준이 높아지면서 기생충·성병약 광고 자리는 피로해소제 광고와 같은 헬스케어 광고가 대체했다. 광고가 시대별 한국인의 생활상을 대변하는 셈이다.

식품 광고는 한국인의 삶에 밀착해 있다. 1960년대에는 추석 선물이나 결혼식 답례품으로 하얀 설탕이 인기가 있었다. 제일제당(현 CJ제일제당)은 백설표 설탕 6kg짜리 상자를 330원에, 설탕 3kg과 조미료 ‘미풍’ 200g을 묶어 560원에 각각 선물용으로 팔았다. 이른바 ‘명절 선물세트’의 효시다.

조미료 광고는 192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오랫동안 신문 광고지면을 차지했다. 동아일보 1926∼1938년 지면에는 일본 ‘아지노모도사’ 광고가 78건이나 실렸다. 조미료를 쓰지 않은 집의 가장이 밥상을 뒤집어엎는 장면을 만화로 그린 광고가 이채롭다.

1955년 조미료 국산화가 이뤄지면서 대중화에 속도가 붙었다. 고 임대홍 대상그룹 명예회장이 1955년 일본 오사카에서 ‘글루탐산나트륨(MSG)’ 제조법을 배워와 이듬해 1월 미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1963년 ‘여인표 미풍’을 인수한 제일제당이 도전장을 내며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순금반지 대 스웨터’ 전쟁이 유명했다.

1970년 2월 미원과 미풍은 빈 봉지 5개를 보내면 각각 순금반지와 스웨터를 준다는 광고를 내며 격돌했다. 두 회사가 나란히 2차 행사까지 준비하자 과열 양상을 우려한 상공부와 치안국까지 나서 경품행사 중지를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지금처럼 조미료에 대한 반감이 있었는지, 두 회사는 1969년 11월 8일 조미료가 건강에 나쁘지 않다는 광고를 함께 싣기도 했다.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는 “조미료를 통한 입맛의 근대화 이후 각 지역마다 다른 맛이 비슷해지는 표준화가 이뤄졌다”고 평했다.

애경산업의 ‘트리오’ 광고는 또 다른 측면에서 한국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1989년 5월 27일 ‘애경트리오 해외여행 사은대잔치’ 광고는 애경산업의 창립 35주년 기념 이벤트였다. 이 행사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해 1월 1일 시행된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 조치가 있었다.

상품 광고는 국민들의 소비력과 직결된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올해 한국의 1인당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2만9730달러다. 지난해 세계은행이 물가를 반영해 발표한 한국 구매력평가지수 기준(PPP) 1인당 GDP는 3만4985달러였다. 동아일보가 창간된 1920년 1인당 GDP는 정확한 통계가 없다. 가장 오래된 통계는 1953년으로 1인당 명목 GDP가 66달러였다. 1인당 국내총생산이 450배로 늘어난 셈이다.

1960∼1980년대 국내 가전, 자동차 기업이 고속 성장하면서 신문광고는 컬러TV와 세탁기, 냉장고, 자동차 광고로 넘쳐난다. 먹고살 만한 시대가 오면서 광고에 등장한 제품도 첨단화됐다. 매일같이 가전제품 광고가 앞다퉈 실렸다. 1980년 12월 10일 동아일보 2면엔 당시의 열풍을 엿볼 수 있는 광고가 실렸다. 금성, 대한전선, 삼성전자(당시 시장점유율 순위) 3사는 ‘칼라TV’의 급격한 수요 증가로 물건을 충분히 공급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내용의 사과 광고까지 실었다.

1976년 1월 ‘우리 힘으로 만든 한국 최초의 고유모델 차, 포니 탄생’ 광고가 실린 뒤 현대차의 스텔라, 프레스토, 쏘나타, 대우자동차의 맵시나, 로얄, 프린스, 르망, 에스페로 광고가 잇달아 실렸다. 현대차는 1985년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동아일보와 함께 당시로는 드물게 ‘어린이는 움직이는 빨간 신호등’이란 캐치프레이즈로 교통안전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이명천 중앙대 광고홍보학과 교수는 “민족 언론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1920년대엔 지방 유지나 민족자본이 후원광고 형태로 동아일보 등 신문사를 돕는 광고를 실었다”며 “이후 소비재 광고가 늘어나면서 신문물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던 광고는 기업 이미지를 고양시키는 이미지 광고로 차츰 변화해 왔다”고 분석했다.

김창덕 drake007@donga.com / 세종=김준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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