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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23년’ 이승엽, 5가지 질문에 답하다

입력 | 2017-12-22 05:30:00

2017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이승엽이 스포츠동아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5가지 선택 질문에 성심을 다해 답했다. 이승엽이 ‘국민타자’로 통하는 것은 야구실력에 필적할만한 인성을 갖췄기에 가능했다.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다사다난했던 2017년 정유년이 이제 그 끝을 한달도 남겨놓지 않았다. 곳곳에 쌓인 눈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성탄장식 등을 보면 새삼 연말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낀다.

한해의 마무리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출발선 긋기다. 아쉬운 선택을 반성하기도 하고, 또 잘한 선택을 밑바탕으로 다음해의 계획을 미리 짜보기도 한다. 그 어느 때보다 마무리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기다.

누구든 여러 고민을 하고, 결론을 내리지만 자신이 했던 선택에 대해 확실한 마무리를 짓는 이는 많지 않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많은 선택을 했고, 또 그 확실한 마무리를 지은 인물이 있다. 바로 ‘국민타자’ 이승엽(41·전 삼성)이다. 박수칠 때 떠나는 모습으로 깔끔한 마무리를 한 ‘국민타자’에게 프로 인생에 손꼽을 만한 여러 키워드들을 뽑아 선택 질문을 했다. 어느 것 하나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질문에 그는 당황한 듯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과연 그 동안 어떤 선택을 했고, 또 그 선택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지난 10월 3일 은퇴 경기에서 626호 홈런을 치고 그라운드를 도는 이승엽.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1995년의 1호 홈런 VS 2017년의 626호 홈런

“데뷔 첫 시즌에 때린 홈런도 의미가 깊지만 마지막 순간에 때린 홈런을 따라갈 수는 없는 것 같다. 일찌감치 은퇴를 선언하고, 감사하게 ‘은퇴투어’까지 했다. 10월 3일의 기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내가 생각한대로 가장 최상의 시나리오가 그려진 날이다. 더군다나 홈런을 두 개나 때렸다. 625호와 626호는 내 인생에서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짜릿하다 못해 온몸에 소름이 돋는 ‘찌릿’한 순간이었다. 더 이상 경기를 뛸 수 없다는 것에 슬펐고, 나를 사랑해주는 만원 관중들에게 마지막 선물을 한 것 같아 또 감격스러웠다. 마지막 유니폼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더욱 더 최선을 다 했다.”

-내심 한 개를 더 치고 싶었다고 들었다.

“사실이다. 두 개를 치고 나니 욕심이 생겼다. 그런 걸 보면 23년을 해도 아직까지 야구를 깨닫지 못한 것 같다. 힘이 들어가니 제대로 된 타구를 만들 수 없더라. 그래도 마지막까지 환호를 해주시는 관중들을 보고 위안을 삼았다. 아마 그날 경기에서는 626호가 아니라 1000호를 쳤어도 아쉬움이 남았을 것이다(웃음). 그 만큼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요미우리 시절 이승엽. 스포츠동아DB


-요미우리 4번타자 VS 삼성 3번타자

“요미우리 4번타자다. 내 생각에 삼성의 3번타자로는 팀이 원했던 만큼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요미우리에서의 활약은 분명 아쉬움이 남는다. 요미우리는 일본리그에서도 최고의 인기팀 중 하나다. 그런 팀의 4번타자 역할을 했다는 것은 야구선수로서 굉장히 자랑스러운 부분이다. 다만 높은 인기만큼 그것에 대한 책임감도 막중했다. 안팎으로 스트레스가 많았다. 요미우리 4번타자는 팀의 승리와 패배에 상관없이 경기를 마치면 무조건 인터뷰를 해야 한다. 좋은 경기를 했을 때는 기분 좋게 인터뷰에 임했지만, 졌을 때는 신중하게 인터뷰를 해야 했다. 단순히 기분이 안 좋다는 것을 표현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내 말 한마디가 팀에 끼칠 영향까지 생각했어야 했기에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웠다.”

2006 WBC 1라운드 3차전 일본전에서 투런 홈런을 친 이승엽.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가장 좋은 기억은 역시 2006년인가?

“물론이다. 2006년에는 항상 좋은 일만 있었다. 요미우리 4번타자로 좋은 활약을 한 것도 물론이고,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도 만족스러운 성적을 거뒀다. 요미우리 4번타자로 뛰게 된 결정된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적 후 아무것도 보여준 게 없는데, 코칭스태프가 ‘너 내일 4번타자다’라고 말했다. 너무 떨려서 잠을 못 잤다. 다행히도 결과는 좋았다. 멀티히트를 때렸는데, 자신감이 붙는 계기였다. 첫 단추를 잘 꿴 느낌이어서 그 2안타가 한 시즌을 보내는데 상당히 큰 역할을 했다.

-‘나를 괴롭혔던 것’ 결과론 VS 슬럼프

“어렵다(웃음). 프로인생을 통틀어 길게 생각하면 결과론이었던 것 같다. 스포츠라는 것은, 특히 프로는 항상 결과로 말하는 법이다. 과정보다는 결과가 우선시되는 게 현실이다. 지금도 수많은 프로들이 이기기 위해 온갖 방법을 총동원한다. 프로는 이기는 것이 명예가 되는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추어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아마추어 선수들에게 강의를 할 때 항상 결과에 절대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그들은 아직 배울 것이 많고, 자신이 세운 목표에 대해 성취감만 내면 된다.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과정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다. 하지만 프로는 다르다.”

베이징 올림픽 당시 이승엽. 스포츠동아DB


-본인은 결과론에 유독 포화를 많이 맞았다.

“나도 프로선수니까 당연한 것 아니겠나. ‘잘 맞은 타구지만 아웃’ 이런 것은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 아웃은 아웃이고, 홈런은 홈런이다. 야구는 특히 기록의 스포츠이다 보니 결과가 숫자로 냉정하게 나온다. 프로라면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런 감정 컨트롤을 얼마나 잘하는가가 특급 선수로 성장하느냐 못 하느냐의 차이다. 잘 다스리는 선수가 실패를 줄일 가능성도 크다. 자기도 모르게 자신감의 흐름을 탈 줄 알아야 한다. 그 묘미가 엄청나다.”

-‘나는 ‘?’ 있는 타자였다‘ 운(運) VS 복(福)

“질문이 더욱 더 어려워진다(웃음). 정말 어렵다. 운과 복, 같으면서도 다르게 느껴지는 말이다. 이 질문에는 섣불리 택일을 못 하겠다. 나는 운과 복이 둘 다 따른 선수였다. 절대 나 혼자만의 능력으로는 여기까지 오지 못 했을 것이다. 운 좋게도 하는 선택마다 좋은 결과가 뒤따랐고, 그 선택을 따라 길을 걸을 때는 복이 뒤따라왔다. 많은 예를 들 수 있다. 처음에 대학을 가지 않고 곧바로 프로무대에 간 것,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했던 것, 일본진출과 2012년 국내복귀, 그 과정에서 만난 여러 스승복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운과 복이 따랐다. 지금 이렇게 돌이켜보니 ‘내가 참 행복한 선수였구나’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이승엽.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번외질문) 혹시 아쉬움이 남았던 선택들도 있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2006년에 야쿠르트 원정을 가서 광고판을 걷어찬 것이다(웃음). 이전 상황에 대해 너무 화가 나서 분을 이기지 못했는데, 그로 인해 부상을 입고 수술까지 받았다. 두 번째는 팬들과 동료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지 못한 부분이다. 사실 마지막 시즌에 야구장에 나오면 정말 많은 팬들로부터 사인요청과 인사를 받았다. 내가 조금만 더 적극적인 성격이었으면 직접 다가가고, 붙임성 있게 행동 했을 텐데, 소심한 부분이 있어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직 은퇴투어를 할 때는 롯데 팬들이 정말 많은 환호를 보내주시더라. 1루 측을 향해 모자라도 한번 벗고 싶었는데, 팀이 지고 있어 끝내 하지 못했다. 아직도 아쉬움이 크게 남아 있는 부분이다.”

-끝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다. 은퇴선언 직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도 은퇴시점을 미리 얘기하겠나.

“은퇴를 하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단호히 얘기했다. 그런데 지금은 솔직히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웃음). 장학재단을 설립하기 위해 여러 일을 하고 있는데, 사회 초년생으로 적응하기가 만만치 않다. ‘선수가 정말 편했구나’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그 때로 돌아간다면 조금 더 뛰어보고 싶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야구인인가보다.”

장은상 기자 awar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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