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식 이화여대 교수·한국죽음학회 회장
― 김범부, ‘풍류정신’》
나는 이 글을 부탁받고 나름의 규칙을 정했는데 그것은 외국인, 특히 백인들의 책을 인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좋지 않은 버릇 중의 하나는 걸핏하면 외국인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다. 무슨 주장을 할라치면 노상 인용하는 게 중국의 고전이나 서양인들이 쓴 책이다. 이것은 뿌리 깊은 문화사대적인 악습이다. 왜 우리라고 훌륭한 분이 없고 쟁쟁한 고전이 없겠는가?
최치원은 한국 고유의 사상을 풍류도라 했다. 신도 혹은 신교 등으로 불러도 상관없는데 한마디로 말해 이것은 우리의 무교(무속)를 뜻한다. 그 핵심은 우주의 영을 접해 망아경에 들어가는 것이다. 무당이 노래와 춤을 통해 신령에 지펴 망아경에 들어가 신령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같다.
내가 보기에 우리 한국인은 다른 어떤 민족보다 이런 신령스러운 기운, 즉 신기가 넘친다. 한국인은 이 신기가 살아나면 천하에 두려운 것이 없다. 예를 들어 남들이 수백 년에 걸쳐 했던 경제 부흥을 단 50년 만에 이룩했다. 또 이 기운은 한류를 만들어냈다. 한류는 한국인이 단군 이래 최초로 한국 문화를 전 세계에 수출한 엄청난 사건이다. 한류의 핵심이 무엇인가? 웅장한 문학이나 깊은 사상이 아니다. 노래와 춤, 그리고 드라마, 그러니까 노는 것, 즉 엔터테인먼트이다.
이 신기는 최치원이 말한 풍류도 이전부터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불교나 유교 같은 외래 종교가 들어오면서 지하로 들어갔고 무당들이 그 기운을 이었다. 이 무당 종교는 생명력이 끈질기다. 불교나 유교는 말할 것도 없고 최근의 기독교 같은 외래 종교가 성행해도 무교는 결코 사그라들지 않았다.
김범부가 보기에 수운이 대단한 것은 1000년 동안 잠들어 있었던 한국인의 신기를 깨운 때문이다. 수운은 한울님을 접하고 자신에게 내재한 신명의 기운을 펼쳐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수운 덕에 우리는 한국인의 가장 깊은 성정인 신기를 다시 체험할 수 있었다.
최준식 이화여대 교수·한국죽음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