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그자를 열두 번이라도 기꺼이 찔렀을 겁니다. 데이지 이전에도 그자에게 유괴당한 다른 아이들이 있고 앞으로도 더 있을 것이기 때문이에요.―오리엔트 특급 살인(애거사 크리스티·황금가지·2013) 》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봤다. 분명 초등학교 때 원작소설을 감명 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었지만 범인이 떠오르지 않았다. 같이 영화를 보러 간 일행 중 하나가 “범인은 ○○다”라고 말해 모두의 원성을 샀다. 결말을 잊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1934년 이 소설을 발표했다. 소설은 호화 특급열차라는 배경과 고립된 공간 안에서의 살인이라는 흥미로운 설정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 속에는 ‘법이 처벌하지 못한 범죄를 누가 심판할 수 있는가’라는 무거운 주제도 담겨 있었다. 대서양을 최초로 횡단한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의 아들 유괴사건을 모티브로 한 점도 이 책을 그저 가벼운 읽을거리로만 여길 수 없게 했다.
이 소설이 83년 전에 던진 화두는 여전히 유효하다. 소설 영화 등에선 자식을 대신한 부모의 복수가 일견 이해되지만 현실은 다르다.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기 때문이다. 올해 2월 한 어머니가 노래방에서 성추행을 당했다는 딸의 말에 격분해 가해자로 지목된 고교 교사를 살해하는 일이 발생했다. 최근 이 어머니에게 징역 7년을 선고한 2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해자 가족의 정신적 고통이 크고 엄벌을 원해 상응하는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적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중첩된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소설을 보는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는 범행 동기다. 기차 속의 범인은 소설 속 유괴사건 피해자와 복잡한 인연으로 얽혀 있다. 이들의 관계를 하나하나 맞춰 나가는 것은 독자에게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세종=최혜령 기자 hersto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