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제 동북아재단 연구위원 논문
최근 이들 고구려 유민이 중국 내에서 집단 취락을 구성하며 고구려계라는 정체성을 유지해 온 사실을 밝혀낸 연구가 나왔다. 이성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계간지 ‘중국고중세사 연구’ 46호에 실은 ‘고구려 유민의 요서 지역 세거와 존재양상’ 논문이다.
논문은 691년 사망한 고구려 유민 고영숙의 묘지명(墓誌銘·죽은 사람의 공로를 돌에 새겨 무덤에 묻은 글·사진)을 분석했다. 묘지는 1975년 중국 랴오닝성 차오양시 근처에서 발견됐다. 그동안 중국 학계에선 거란계가 많이 거주했던 이 지역의 특성상 고영숙 역시 거란인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뿐만 아니라 묘지에는 고운의 후예이자 고영숙의 증조부 고회(高會)와 할아버지 고농(高農)이 ‘본번대수령(本蕃大首領)’을 지냈다고 밝히고 있다. 본번대수령은 고구려인으로 이루어진 집단의 장이란 뜻이다. 또 아버지 고로(高路)는 사주(師州) 지역을 통치하는 자사(刺史)였다고 나와 있다. 사주는 현재 중국 차오양시 일대로 중국과 거란, 고구려의 경계에 있던 지역이다. 이 연구위원은 “고구려계 수령이 존재한 사실을 통해 당시 요서지역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정체성을 유지한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주목할 점은 이들이 살아왔던 시기다. 4세기부터 7세기까지 요서지역에서 거주한 이들은 5호16국 시대부터 수나라와 당나라까지 중국 정치권력이 격변하던 시기를 살았다. 중국 한족 정권이 교체되는 동안에도 고영숙 가문은 수령 자리를 세습하며 고구려계 문화를 유지해온 것이다.
이 연구위원은 “중국에서 고구려로 유입된 이들에 대한 연구는 상당 부분 진행됐지만 거꾸로 고구려 유민들이 중국에서 집단 취락을 이룬 사실을 밝혀주는 연구는 거의 없었다”며 “고구려 유민들의 삶을 조명하는 연구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