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8일 평양에서 열린 미국 전직 프로농구 선수들과 북한 농구 선수들과의 친선 경기 도중 데니스 로드먼이 김정은 부부를 향해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동아일보 DB
주성하 기자
묘기 농구단 ‘할렘 글로브 트로터스’를 데리고 간 로드먼은 이날 김정은과 리설주 앞에서 북한 팀과 친선경기를 펼쳤다. 평양에서 고르고 고른 핵심 계층들로 1만2000석 규모의 관중석도 꽉 찼다.
처음 보는 거구의 흑인들이 눈앞에서 뛰어다니는 농구경기도 흥미로웠지만, 김정은의 일거수일투족도 관중의 중요 관심사였다. 김정은이 등장해 불과 1년 남짓 지났던 때라 대다수 관중은 그렇게 가까이에서 김정은을 본 것이 처음이었다.
미국 선수가 김정은에게 다가가 할렘 글로브 트로터스의 유니폼을 전달하자 김정은은 활짝 웃으며 유니폼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몸을 돌려 왼쪽을 향해 몇 번 흔들고, 뒤를 향해 흔들고, 다시 오른쪽을 향해 흔들고…. 유니폼 선물을 관중을 향해 흔드는 것은 한국이나 또 외국의 기준으로 보면 크게 이상한 것은 없다.
문제는 그곳이 가장 폐쇄적인 북한이라는 점이다. NBA가 뭔지, 유니폼 선물이 뭘 의미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곳이다. 아무리 유명 인사가 기념 사인을 해주려고 해도 “함부로 낙서하지 마시라요”라며 펄쩍 뛸 곳이 평양이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린 김정은을 신처럼 보게끔 교육받았단 말입니다. 우리 지도자에게 양키가 난닝구를 선물한 것도 우릴 거지로 여기나 싶어 자존심 상하는데, 지도자란 사람이 미국 놈한테 스프링(러닝의 북한 사투리) 쪼가리나 받고선 입이 귀까지 째져서 우릴 향해 흔들며 자랑한단 말입니다. 전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위대한 영도자는 무슨 개뿔. 저거 바보 아니냐 싶더라고요.”
김정은이 로드먼에게 ‘우리의 우정을 위하여 김정은. 2013.2.28’이라고 적힌 선물까지 주었다는 것을 알면, 북한 사람들은 더 충격을 받았을 게 분명하다.
이듬해 김정은의 30번째 생일인 1월 8일 비슷한 일이 또 벌어졌다. 이번엔 로드먼이 경기장에서 김정은을 “베스트 프렌드”라고 지칭하면서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고 경기 중엔 김정은 옆자리에서 담배까지 피웠다. 대단한 고위 간부도 김정은 앞에선 무릎을 꿇고 입까지 가리는 것만 봤던 북한 사람들은 그저 속으로 “세상에”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귀와 코, 심지어 입술에까지 고리를 매단 저 정신 이상해 보이는 흑인 ‘양키’가 도대체 뭔데 공개 장소에서 감히 우리의 ‘최고 존엄’을 친구라 스스럼없이 부르며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맞담배까지 피우다니.”
그들에게 “김정은은 스위스 유학 시절 로드먼의 유니폼을 입었던 광팬이었다”고 설명해도 소용이 없다. 그럼 “팬이란 게 뭔데요”라고 반문할 게 뻔하다. 남쪽에 갓 온 탈북민에게 팬이 뭔지 장황하게 설명해줘도 “세상에 밥 먹고 할 짓도 없지”라는 대답을 듣기 일쑤다.
로드먼은 북한을 5차례 방문했지만, 지금은 가지 못한다. 미 국무부가 9월부터 미국인의 북한 여행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로드먼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자신을 북한에 평화특사로 파견해 달라고 촉구했고, 11일엔 중국 베이징까지 가서 괌과 북한 간의 농구경기를 주선하겠다며 인터뷰도 열었다. 그래도 방북 허가는 얻어내지 못했다. 북한에서 어떤 대접을 해주었기에 저렇게 애타게 가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허가 절차를 무시하고 북한에 가지 않는 것을 보면 적어도 친구 옆에서 살 생각은 없는 것 같다.
내가 볼 때 로드먼은 김정은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다. 미국 호텔 바에서 큰 소리로 세 시간이나 김정은을 칭찬하다 쫓겨난 일도 있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에 김정은을 비난하면 로드먼이 참지 못하고 반박한다.
로드먼을 향한 김정은의 팬심이 지금도 그대로일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둘이 계속 어울려 같이 노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아 보인다. 이들의 정신세계를 더 자주,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지 않을까.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