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구월산에는 9세기 초 창건된 패엽사(貝葉寺)가 있다. 신라 말기 서역에서 수행하고 돌아온 한 승려가 이곳에 패엽경을 보관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패엽경은 팔미라야자를 비롯한 야자나무 잎을 말리고 찌고 삶아 건조한 뒤 송곳으로 긁어 문자를 새긴 불경이다. 패엽의 ‘패’는 산스크리트에서 잎을 뜻하는 파트라를 음역한 패다라(貝多羅)에서 따왔다. 초기 불경은 주로 패엽에 기록되었다.
이집트의 지중해 연안 습지에서 주로 채취된 파피루스는 영어 단어 페이퍼(Paper)의 어원이다. 파피루스 줄기의 속대를 얇게 벗겨 가로세로로 겹쳐놓고 물에 적셔 두드린 뒤 뼈나 조개껍질로 문지르고 햇볕에 말린다. 이집트에서 유럽으로 많이 수출됐으나 종이가 보급되면서 12세기 이후 파피루스 사용은 급감했다. 식물뿐 아니라 동물도 쓰였다. 양, 염소, 소 등의 가죽을 가공한 양피지, 거북의 배딱지나 소의 견갑골에 글자를 새긴 갑골문 등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널리 쓰인 점토판, 나무껍질 안쪽 면, 도자기에 문자를 기록한 도문(陶文), 옥판에 기록한 옥책, 목판에 입힌 밀랍에 글자를 새겨 쓰는 밀랍서판. 이렇게 역사적으로 기록 재료는 매우 다양했지만 사실상 종이로 통일됐고 21세기부터는 디지털 파일이 대세다. 머지않은 장래에 어떤 작가를 기리는 문학관에서, 작가의 육필 원고가 없으니 원고 파일을 모니터에 띄워 전시하게 될지 모른다. 기록 재료의 혁명은 한창 진행 중이다.
표정훈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