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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훈의 호모부커스]거북 배딱지부터 디지털 파일까지

입력 | 2018-01-01 03:00:00


명수죽백(名垂竹帛). ‘이름을 죽백에 드리운다’, 즉 탁월한 업적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긴다는 뜻이다. 죽백은 글을 기록하는 데 사용한 죽간과 비단이다. 대나무의 퍼런 껍질을 긁어낸 뒤 수액을 없애고 해충을 방지하기 위해 불에 쬐인 다음 쪼개어 죽간을 만들었다. 비단에 쓴 백서는 1801년 황사영이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해 베이징 주교에게 써서 보내려 했던 ‘황사영백서’가 우리 역사에서 유명하다.

황해도 구월산에는 9세기 초 창건된 패엽사(貝葉寺)가 있다. 신라 말기 서역에서 수행하고 돌아온 한 승려가 이곳에 패엽경을 보관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패엽경은 팔미라야자를 비롯한 야자나무 잎을 말리고 찌고 삶아 건조한 뒤 송곳으로 긁어 문자를 새긴 불경이다. 패엽의 ‘패’는 산스크리트에서 잎을 뜻하는 파트라를 음역한 패다라(貝多羅)에서 따왔다. 초기 불경은 주로 패엽에 기록되었다.

이집트의 지중해 연안 습지에서 주로 채취된 파피루스는 영어 단어 페이퍼(Paper)의 어원이다. 파피루스 줄기의 속대를 얇게 벗겨 가로세로로 겹쳐놓고 물에 적셔 두드린 뒤 뼈나 조개껍질로 문지르고 햇볕에 말린다. 이집트에서 유럽으로 많이 수출됐으나 종이가 보급되면서 12세기 이후 파피루스 사용은 급감했다. 식물뿐 아니라 동물도 쓰였다. 양, 염소, 소 등의 가죽을 가공한 양피지, 거북의 배딱지나 소의 견갑골에 글자를 새긴 갑골문 등이다.

동식물 외에 돌로는 기원전 18세기 석비에 새겨진 함무라비 법전이 유명하다. 중국에는 유교 경서를 새긴 석경이 많았다. 경서 12종 65만여 자를 114개 비석에 새긴 당나라의 개성석경(開成石經)이 대표적이다. 금속에도 기록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백제의 ‘금제사리봉안기’는 금판 양면에 글자를 음각하고 주칠(朱漆)을 입혔다. 고대 중국의 의례용 청동 솥인 정(鼎)은 명문(銘文)이 새겨진 것들이 많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널리 쓰인 점토판, 나무껍질 안쪽 면, 도자기에 문자를 기록한 도문(陶文), 옥판에 기록한 옥책, 목판에 입힌 밀랍에 글자를 새겨 쓰는 밀랍서판. 이렇게 역사적으로 기록 재료는 매우 다양했지만 사실상 종이로 통일됐고 21세기부터는 디지털 파일이 대세다. 머지않은 장래에 어떤 작가를 기리는 문학관에서, 작가의 육필 원고가 없으니 원고 파일을 모니터에 띄워 전시하게 될지 모른다. 기록 재료의 혁명은 한창 진행 중이다.

표정훈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