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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삼 전문기자의 맨 투 맨]제재가 키우는 시장경제의 싹

입력 | 2018-01-03 03:00:00


프랑스 여성지 ‘마담피가로’가 지난해 평양 여명거리에서 촬영한 북한 여성들. 동아일보DB

이형삼 전문기자

중국의 조선족 기업인 L 씨는 김일성대 박사 출신의 북한통이다. 10여 년간 북한을 꾸준히 드나들었고 지난해에만 7차례 평양을 다녀왔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15형’을 발사한 11월 말에도 평양에 있었다. 지난달 학술회의 참석차 서울을 찾은 그에게서 평양의 최근 상황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먹고 마시는 상품 가격에 큰 변동이 없고, 입고 쓰는 물품이 줄지 않아 인민생활에선 대북제재를 실감할 수 없었다”고 했다. 3배 이상 치솟던 휘발유 값은 제재가 심화된 11월 들어 오히려 떨어졌고, 쌀 고기 계란 채소류 등도 안정된 가격에 거래됐다. 장마당엔 인파가 넘쳐났고 허용시간도 2시간 늘었다. 북측은 “가공식품은 100% 자체 해결했다”고 자부했는데 실제로 슈퍼마켓에서 판매하는 제품은 대부분 북한산이었다. 해외에서 귀국한 사람들의 소비가 늘면서 경기가 활성화하고 질 좋은 제품에 대한 요구 수준이 높아졌다고 한다.

특히 눈에 띈 것은 서비스산업의 활기였다. 줄지어 들어선 새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들의 아래층에는 꽤 세련된 인테리어의 식당 식품점 목욕탕 커피숍 맥주바 같은 각종 봉사시설이 빼곡했다. 식당의 메뉴판은 중국 못지않게 고급스럽고 아이패드로 주문받는 업소도 있었다. 사우나 바람이 불면서 평양에만 수십 곳이 성업 중인데 목욕과 함께 미용·미안(美顔)·안마 패키지 서비스도 인기였다. 팁에 맛들인 종업원들의 봉사 태도는 예전과 딴판으로 매우 열성적이었다. 과일 등을 파는 노점상도 곳곳에서 목격됐다. 평양엔 약 2500대의 택시가 밤낮으로 돌아다녔다(일부는 홀짝제).

L 씨는 “김정은 집권 6년간 기본적 자급자족을 이뤄낸 듯했다. 경제혁신 정책에서 탄력을 받은 게 주요인”이라고 분석했다. 가령 농장원들은 파종에서 수확까지 전 과정을 책임지며 성과를 키운 뒤 할당된 몫을 납부하고 남은 것은 알아서 처분한다. 경공업이나 서비스업에서도 생산수단을 이용한 대가로 국가에 일정 비율을 지불하는 것 외에는 자체 처분을 허용한다. 남아도는 설비나 원자재는 과거처럼 국가를 통하지 않고 기업들끼리 협의해 거래한다. 수십만 건의 국가실행계획을 취소한 대신 국가는 중요 지표만 내세우고 세부적인 것은 기업의 결정에 맡긴다. 원자재 선택, 설비 구입, 생산품 선택, 가격 제안, 판매시장 개척권 등이 기업으로 넘어갔다. 정보 빼오기 경쟁, 인재 스카우트 경쟁, 계획 완수를 위한 다양한 경쟁도 벌어지고 있다.

기업은 이렇게 얻은 성과로 월급도 많이 주고 복리도 잘해 줘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국가 배급 기능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됐다고 한다. 그 결과 전적으로 국가 배급에 의존하는 것은 정부기관, 교육기관, 연구기관 등 비생산 조직뿐이라는 것. 빈곤층에 대한 국가의 관심도 높아져 직장, 기관마다 간부들이 어려운 구성원을 돌보라고 요구한다. 주민의 생활고와 관련한 신고가 들어오면 간부들에게 책임을 추궁한다.

제재 강화에 대비한 선제적 조치도 단행했다. 식품 건자재 목재가구 생필품 등 자체 생산할 수 있는 물자는 수입을 금지했다. 국내 기업을 보호하고 제재의 주요 통로인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는 의도가 읽힌다. 제재 대상인 해외 파견 근로자들에게 “어렵게 뻗치지 말고 철수하라”고 통보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말로는 “제2의 고난의 행군을 각오하자”며 정신무장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상황이 안 올 것으로 확신한다. ‘과거엔 우리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우리 것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한다.

L 씨는 “북한은 오랜 제재로 면역력이 생겨 이미 나름의 생존방식을 터득했다. 제재의 목적이 그들을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고 두 손 들게 하는 것이라면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봤다. 국제 제재가 주민들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측면도 있다고 했다. 그는 “대북제재의 실질적 피해자는 북한이 아니라 우리처럼 북한과 합영·합작·무역 거래를 하는 중국 기업과 접경지 단둥 일대의 북한인 대상 상점들”이라며 답답해했다.

그러나 정반대의 시각에서 볼 수도 있다. 고강도 제재 아래서 자생력을 끌어올리려면 낮은 단계지만 시장경제와 경쟁체계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재가 없었다면 핵과 미사일 개발에 집중됐을 자원이 미미하게나마 민간 부문을 챙기는 데 투입된 것도 긍정적이다. 김정은은 그제 발표한 신년사에서도 경제와 민생에 대한 고민을 감추지 않았다. 제재가 일상이 된 나라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조금씩 깨달아 가며 변화를 받아들이게 된 건 제재가 제대로 먹혀들고 있다는 증거다. 제 힘으로 일어선 북한은 통일의 후유증을 최소화할 동반자로서도 적격이다.

이형삼 전문기자 han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