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양환 문화부 차장
희한한 건, 볼 때마다 새로운 장면을 목도한다. 몹쓸 기억력. 며칠 전 1편 ‘본 아이덴티티’가 그랬다. 과거를 잊어버린 제이슨 본(맷 데이먼). 어렵사리 자기 집을 찾아내 벨을 눌렀다. 빈집인 건 당연지사. 옆에 있던 마리(프랑카 포텐테)가 이런 농을 던진다.
“You are not here(당신은 여기 없네요).”
“기껏 찾아왔더니, 없다 그러니까 이상하죠? 사람이 그런 존재입니다. 육신이 왔다고 함께 있는 게 아니죠. 이렇게 인연을 맺었지만, 아직 서로 잘 모르잖아요. 본질은 자신을 둘러싼 다양한 조각들이 모여서 이뤄집니다. 그걸 조금씩 알아가며 존재의 가치도 올라가죠. 전 지금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은 겁니다.”
어디에 머무르는지로 깨닫는 존재의 가치라…. 그런 뜻이라면, 법현 스님만큼 독특한 존재감을 지닌 인물도 흔하지 않다. 스님이 2005년 연 대한불교태고종 열린선원은 서울 은평구 역촌중앙시장에 있다. 50년도 넘은 재래시장은 딱 봐도 세월의 ‘짠내’가 시큼하다. 요즘 서울에선 희귀한 지물포나 방앗간에 묻혀 찾기도 힘들다. 심지어 바로 옆에 교회도 있다.
“처음엔 만류도 컸죠. 세상에서 제일 시끌벅적한 곳에서 불도를 닦을 수 있겠느냐고요. 하지만 종교가 뭡니까. 사부대중에게 법을 전해야지요. 그렇다면 시장은 최고의 포교 터죠. 교회와도 사이가 무척 좋습니다. 해마다 12월엔 ‘성탄절 축하’ 현수막도 내거는 걸요. 껄껄.”
물론 자기 자리를 아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청년들은 대다수가 앞길을 고민한다. 법현 스님도 엇비슷했다. 대학 때부터 출가를 고민했지만 가족이 걸렸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살림. 장남은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삶은 참 까다롭다. 지금 서 있는 인생도 가끔 뒤통수를 친다. 열심히 하루를 살아가도 우리는 여기에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땐 방법이 없다. 주위를 둘러보는 수밖에.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들이 있을 것이다./이런 때도 저런 때도 그저 따땃이 해라./더구나 추운 때는 따슨 것이 제일이여./찬바람 맞고 다니다가도/바람벽에 볕 들먼 좋지 않드냐?’(법현 스님의 책 ‘그래도, 가끔’에서)
그래, 결국 옷깃을 여미는 건 마음먹기에 달렸다. 우리가 어디에 서 있건 간에. 둘러보면 분명 손잡아 줄 이가 있다. 그렇게 한발씩 내디뎌야 한다. 또 한 해가 시작됐다.
정양환 문화부 차장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