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동아일보]<9> 1995년 중편소설 당선 전경린 씨
1995년 1월 4일자에 실린 전경린 씨의 신춘문예 중편소설 당선 소감(위 사진). 2002년 전경린 씨는 본보 주최로 충남 태안군 안면도에서 열린 제1회 전국 구간마라톤 겸 마스터스대회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로 등단한 여성 작가들과 함께 참석했다. 송우혜 홍은경 조민희 전경린(실선) 윤명제 은희경 송혜근 한정희 씨(앞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동아일보DB
시골구석에서 살아온 선친의 친구와 지인, 문중 어른들이 평생토록 매일 나라 돌아가는 사정을 알기 위해 펼쳐 보아온 동아일보에 내가 소설가로 당선하고 심지어 연재를 하니,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보다 대단하다며 여자지만 족보에 올리겠다는 말이 나왔다. 다음 해에 실제로 그렇게 했다.
당선 통보를 받았을 때 방이 빙빙 돌던 기억을 언제까지나 가지고 있다. 현기증으로 방바닥을 짚는데 문학담당 기자가 물었다. “본명과 응모한 이름 중에서 어떤 이름으로 발표할까요?”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소설을 쓰고 신문사로 보내기만 했지 그 다음을 고려해보지 않았거니와, 응모한 이름은 떨어질 경우 주변에 눈길을 끌지 않기 위해 임기응변으로 지어 보냈던 것이다. 만약 기자가 내게 묻지 않고 본명으로 발표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지만 기자는 나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었다. “발표하는 당선자 이름은 앞으로 죽 써야 합니다.” 나는 미래의 책 표지에 오른 이름을 상상해 보았다. “전경린으로 할게요.” 내 필명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당시 기자는 당선의 현기증과 발표의 긴박감 사이에서 필명을 받아낸 산파인 셈이다.
‘내 생에…’는 여성의 내면을 자연의 배경과 연대해 표출한 강렬한 문체로 읽혔다. 2000년대에 들어 호주제와 간통죄가 차례로 폐지되었고 개인이 권력 구조로부터 좀 더 독립했고 사생활의 범위가 확장되었다. 사회 역시 의식의 질적 변화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정치, 경제와 문화를 비롯해 여러 부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만 의식의 변화를 일으키는 중심에는 인문학의 힘이 있다. 이 모든 것이 부자유스럽고 빈곤했던 1920년 4월 1일에 창간한 동아일보는 1925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신춘문예 공모를 시작해 작품과 문인 발굴에 힘을 쏟아 왔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의 역사에서 황순원 김동리 정비석 서정주의 이름을 확인했다. 황금 계보는 놀라웠다. 한수산 현기영 조성기 이문열 정진규 오탁번 송기원 기형도 남진우 안도현의 이름도 눈부셨다. 윗대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 박완서 최명희 두 분도 여성동아 공모전 출신이다. 그리고 1995년에 등단한 은희경 씨와 나, 후배 조경란 윤성희 김언수…. 새삼 자랑스러움을 느끼며 내가 동아일보로 등단한 것이 우연이 아니기를 바란다. 동아일보는 소설가 전경린이 화려한 갈채를 받으며 세상으로 나온 문이고, 연재라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대표작 ‘내 생에…’를 쓰도록 끌어준 힘 있는 양육자였다.
소설가 전경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