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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조건없이 “맘껏 연구하라”… 대기업이 직접 벤처 육성

입력 | 2018-01-08 03:00:00

[3만 혁신기업이 3만달러 한국 이끈다]<3> 美 실리콘밸리의 창업 지원




미국 서부 도시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쪽으로 약 5km 떨어진 사우스샌프란시스코(SSF)는 세계적인 ‘바이오클러스터’로 꼽힌다. 글로벌 바이오기업 제넨텍과 암젠을 포함해 200여 개 기업이 모여 있다. 2016년 생명공학 분야의 고급 일자리만 연간 2만 개를 만들어 낸 곳이다. 생화학 분야 종사자의 평균 연봉은 11만 달러(약 1억1700만 원)를 넘는다.

헬스케어 기업 존슨앤드존슨은 이곳에 바이오 스타트업 육성을 위한 시설 ‘제이랩스(JLABS)’를 운영하고 있다. 존슨앤드존슨은 2016년 기준 제약 부문 매출 335억 달러(약 35조5100억 원)에 이르는 대기업이다. 초기 단계의 바이오 스타트업이 일정 사용료를 내고 연구실에 입주하면 제이랩스가 적극 지원한다.

이곳에서 대기업은 스타트업을 통해 신성장동력을 찾고, 스타트업은 대기업의 자산과 네트워크를 토대로 성장하는 등 ‘윈윈 관계’를 맺고 있다. 대기업이 생색내기식 지원을 하거나 심지어 스타트업 기술을 베낀다는 논란이 빚어지는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 대기업의 혁신 생태계 속에 들어간 스타트업

지난해 12월 11일(현지 시간) 찾은 SSF의 제이랩스에서는 각 실험실에서 한두 명의 연구원이 제각기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SSF가 세계적인 바이오클러스터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이곳 입주 기업들은 꼭 번듯한 실험실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콘셉트 랩’이라는 공용 공간에 의자 하나를 두고 입주한 기업도 있다. 전체 제이랩스 입주 기업 중 45%가 1, 2인 기업이다.

니마 살레스 운영매니저는 “실험실 하나를 임대할 여건이 안 되는 작은 스타트업 10곳이 여기서 연구 중이다. 이들에게도 성장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제이랩스의 심장부’로 불린다”고 설명했다.

작은 기업이 오밀조밀 모여 있지만 성과가 적지 않다. SSF를 비롯해 북미 8개 도시에 190개 기업이 입주해 있는데, 이들 입주 기업의 가치는 약 94억 달러로 추산된다. 기업공개(IPO)나 인수합병(M&A)에 성공한 기업이 13곳이나 된다.

이곳 실험실 중간에는 입주 기업이라면 아무나 쓸 수 있는 공용 설비가 있었다. 입주 기업들은 영하 20도, 영하 80도로 맞춘 냉동고와 유세포 분석기, 원심분리기 등 수억 원대의 값비싼 설비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초기 장비 비용 부담을 덜어주려는 것이다. 피펫, 시험관 등 실험실 자재의 택배를 맡아주는 제이랩스 직원도 있다. 입주 기업은 연구 외 부수적인 업무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입주 기업 ‘카이메라 바이오엔지니어링’의 벤 왕 대표는 “초창기 많은 비용을 절감하면서 연구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제이랩스의 가장 큰 특징은 입주 기업이 운영사 존슨앤드존슨과 별개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점이다. 제이랩스는 ‘아무 조건 없이(No strings attached)’라는 철학을 내세운다. 레슬리 스톨즈 제이랩스 캘리포니아 대표는 “스타트업 입주 시 지식재산권에 관해 존슨앤드존슨과 맺어야 하는 조건은 없다. 다른 대기업이 전략적으로 도움이 될 분야를 연구하는 스타트업 유치에 치중한다면 우린 당장의 이익보단 혁신적인 생태계 구축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존슨앤드존슨과 직간접으로 이해관계가 있는 입주 기업은 전체의 20%에 불과하다.

한국을 떠나 이곳에 둥지를 튼 바이오 스타트업도 있다. 2015년 대웅제약의 자회사 한올바이오파마에서 분사해 항암제를 개발하는 ‘이뮤노멧’은 2016년 9월 텍사스주 휴스턴의 제이랩스로 본사를 옮겼다. 제이랩스에서 설비, 투자 등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구체적인 연구는 MD앤더슨 암센터와 진행 중이다.

유상희 이뮤노멧 상무는 “제이랩스 입주 후 임상 담당자나 벤처 투자자를 만날 기회가 많아졌다. 존슨앤드존슨은 입주 기업에 아무런 조건을 내걸고 있진 않지만 어느 회사보다 먼저 기술 정보를 접할 수 있다는 강점을 지닌다”고 전했다. 사실상 존슨앤드존슨이 혁신 기술을 선점하는 효과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입주 기업과 존슨앤드존슨 그룹이 맺은 협력거래는 71건에 이른다.

○ ‘윈윈’ 노리는 대기업-스타트업 매칭

캘리포니아주 도시 서니베일에 있는 ‘플러그앤드플레이(Plug and Play)’는 ‘한 박스 안의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 in a box)’로 불린다.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연결(match-making)에 강점이 있다. 구글과 페이팔을 배출한 이곳은 민간 기관으로, 대기업 파트너, 투자자, 멘토 등을 한곳에 모아놓은 덕에 ‘실리콘밸리의 축소판’으로 불리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12일(현지 시간) 찾은 플러그앤드플레이 본사 로비 벽에는 P&G, 지멘스 등 다국적 대기업 로고가 빼곡히 붙어 있었다. 이곳에 입주한 450여 개의 스타트업에 사무실과 멘토링 프로그램, 투자 유치 기회 등을 제공하고, 130개가 넘는 대기업 파트너와도 연결해준다. 메건 래미스 매니저는 “40∼50개 대기업의 의사결정 담당자들이 나와 입주 스타트업과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피드백을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브랜드·유통, 핀테크, 사물인터넷(IoT) 등 11개 분야에서 연결이 이뤄지고 있었다. 유망 스타트업을 찾는 대기업은 지분 투자나 M&A 등 다양한 협력을 모색할 수 있다.

이곳에 온 스타트업은 사업 초기부터 대기업과의 협력에 속도를 낼 수 있다. 품질 손상 없이 이미지 용량을 줄이는 기술을 보유한 스타트업 ‘샌드케이지’는 입주 2개월 만에 통신, 게임업계 대기업과 초기 협업을 진행하고 있다. 도나 레브 샌드케이지 최고운영책임자(COO)는 “대기업을 상대로 한 기술이기에 고속도로를 탄 듯 모든 진행이 빠르다”고 말했다.

주프 탄 플러그앤드플레이 수석부사장은 “40∼60%의 스타트업이 대기업과 파일럿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대기업이 스타트업의 시장성을 증명해주는 구매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우스샌프란시스코·서니베일=박은서 기자 clu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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