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동아일보]<10> ‘서울대생 고문치사’ 박종철 형 박종부 씨
동아일보는 1987년 1월 19일 1면 톱기사로 ‘물고문 도중 질식사’를 특종 보도해 서울대생 박종철 씨 사망의 진상을 밝혔다. 박 씨의 친형 종부 씨(60)가 5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부설 신문박물관에 전시된 해당 기사를 가리키며 동아일보가 동생의 고문치사를 밝혀 민주화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회상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1987년 1월 16일 ‘대학생 경찰조사 받다 사망’ 기사를 특종 보도하며 박 씨의 얼굴(위)을 처음 세상에 알렸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담배 연기를 두어 모금 내뱉을 때쯤 철문 너머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동아일보 기자입니다. 서울대생 유족 안에 계세요?” 누군지 확인이 불가능했다. ‘동아일보 기자’라니 믿기로 했다. “여기 있소. 내가 형이오”라고 조용히 답했다. 당시 나는 스물아홉 살로 종철이와 일곱 살 터울이었다. 밖의 목소리는 “박종철 맞습니까?”라고 물었고, 나는 “서울대 3학년생”이라고 답했다. 단답식 대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어디선가 형사들이 여러 명 달려들었다. 양팔이 붙들린 나는 영안실로 끌려 들어갔다.
장례식을 치르고 경찰 조사를 받느라 정신없이 며칠이 흘러갔다. 철문 너머 동아일보 기자와 몇 마디 주고받았던 게 떠올랐다. 1월 19일이었다. 신문을 찾아봤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동아일보를 펼치는 그 순간 벌벌 떨렸던 손의 감각이 생생하다.
기사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화장한 종철이의 유골을 강물에 뿌리던 순간이 떠올랐다. 또 눈물이 쏟아졌다. 그날 한겨울 물가는 얼어있었다. 뼛가루가 자꾸만 얼음 주위에 고였다. 아버지와 함께 찬 강물에 들어가 손을 휘저으며 종철이의 유골을 물속으로, 물속으로 흘려 보냈다. 아버지는 허리까지 물에 잠긴 채 종철이 유해가 담겨있던 종이봉투를 강물 위에 띄웠다. “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다이”라고 소리쳤다. 이 장면은 동아일보 1월 17일자에 ‘창(窓)-이 아비는 할 말이 없다이’로 단독 보도됐다. 기사 제목은 그대로 6월 민주항쟁을 상징하는 플래카드에 쓰였다.
그 전까지 나는 종철이의 억울한 죽음이 밝혀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지 못했다. 당시엔 종철이 말고도 서울대생 의문사가 많았다. 발에 시멘트 덩어리가 매달린 채 수장된 김성수 씨, 철로변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우종원 씨 등. 암흑이었다. 과연 누가 진실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을까.
동아일보의 1월 19일자 보도는 한 줄기 빛이었다. 그 전에 나온 동아일보도 찾아봤다. 1월 16일자 사회면 중간톱 기사 ‘대학생 경찰 조사 받다 사망’부터 시작해 연일 종철이의 사망 원인을 추적하는 보도를 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동아일보를 보며 나와 우리 가족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동아일보는 유족인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사회 전체가 공권력에 무참하게 짓밟히던 시절 동아일보는 신뢰할 수 있었다.
영화 ‘1987’이 400만 관객을 돌파했다고 한다. 많은 분들에게 당시 진실을 전할 수 있어 다행이다. 영화는 엄격한 고증을 통해 그 엄혹했던 시절을 거의 그대로 재현한 역작이다. 동아일보의 정확한 기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동아일보 보도로 당시 검찰은 수사를 4번이나 했다. 최초 적발된 고문 경찰관 2명에 대한 1차 수사, 고문 가담자 경찰관 3명에 대한 2차 수사, 박처원 대공수사처장 등 은폐 및 조작을 지휘한 경찰 수뇌부에 대한 3차 수사를 모두 동아일보가 끌어냈다. 그 결과 이듬해 강민창 치안본부장에 대한 4차 수사가 벌어졌다. 동아일보는 1988년 1월 14일자 ‘검찰도 수사 대상이다’라는 제목의 보도로 엄정한 진상규명을 채찍질했다.
민주화는 종철이의 죽음이 없었더라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하지만 종철이의 희생이 민주화를 앞당긴 것은 분명하다. 동아일보의 보도 역시 마찬가지다. ‘물고문 도중 질식사’ 기사가 없었다면 민주화는 한참 늦어졌을 것이다.
박종철 형 박종부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