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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잡史]종이 만드는 공무원, 6개월씩 3교대 근무

입력 | 2018-01-08 03:00:00

‘지장’




전통 방식으로 종이를 만드는 모습을 담은 옛사진. 인터넷 화면 캡처

“중국에서는 종이를 금처럼 귀하게 여겨 한 조각도 땅에 버리는 것을 볼 수 없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종이를 흙처럼 하찮게 쓰니….”―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 중

조선시대에는 책과 편지뿐 아니라 벽지, 장판, 창호 등 생활용품부터 옷, 갑옷에 이르기까지 종이가 쓰였다. 초상집에 종이로 부조하는 풍습도 있었다. 장례를 치르기 위한 필수품이었기 때문이다.

종이의 수요가 늘자 태종은 1415년 조지소(造紙所)를 설치했다. 조지소에는 종이 제작을 담당하는 지장(紙匠)이 배속됐는데 서울에만 81명, 지방 221개 군현에 692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6개월씩 3교대로 일했다. 국가에서는 토지를 따로 마련해 그 소출로 월급을 지급했다.

지장 외에도 각종 기구를 만드는 목장(木匠), 종이를 뜨는 발을 만드는 염장(簾匠), 그리고 노비 100여 명이 북적거리며 일했다. 죄를 짓고 노역형에 처해진 자에게는 닥나무를 다듬고 종이를 두드리는 도침군(도砧軍)을 시켰다. 도침군은 고되기로 유명해 기피 대상이었다. 세종 대에는 노역형 대상자를 무조건 조지소로 보냈다.

종이를 만들려면 닥나무와 잿물, 황촉규(닥풀)가 필요했다. 1년생 닥나무를 잿물에 삶은 뒤 오래 두드려 닥섬유를 추출하고, 황촉규 뿌리의 점액 성분을 추출해 지통에 닥섬유와 함께 풀어뒀다. 이것을 발로 떠내어 말리면 종이가 만들어졌다. 100번의 손질이 필요하다고 해 백지(百紙)로 불릴 만큼 손이 많이 갔다.

백성들에게 의무적으로 닥나무를 심도록 했지만 닥나무의 공급은 나아지지 않았다. 봉급마저 나오지 않게 되자 지장은 점점 줄어들었다. 81명이었던 서울의 지장은 임진왜란 이후 4명이 되었고, 60명이던 도침군도 5명밖에 남지 않았다. 지장은 사찰이나 민간에서 종이를 만들었고 조정에서는 지장이 필요할 때만 고용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나라에 조공하는 종이의 수량이 폭증했다. 한 해 7500권 정도 필요했던 백면지(白綿紙)가 6만 권으로 늘어났다. 조정에서는 부족한 종이의 생산을 각 지역의 절에 부담시켰고, 종이 만드는 괴로움에 승려들이 도망가 절이 텅 비어 갔다. 이후 다른 조공품의 수량은 점점 줄었으나 종이는 오히려 늘었다. 품질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18세기에 들어서며 종이는 더욱 다양한 모습을 띠었고 생산 수량도 크게 늘었다. ‘산림경제’와 ‘임원십육지’에는 원료, 색깔, 두께, 질, 용도에 따라 100종 이상이 나온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위백규는 종이 사치와 낭비가 만연한 풍조를 비판했다. 또 탐관오리들이 지장이 납품하는 종이를 퇴짜 놓으며 그 10배에 달하는 뇌물을 요구하거나 납품가를 100분의 1로 후려친다고 폭로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천년 가는 종이를 만드는 지장의 명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김동건 동국대 동국역경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