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동아일보]<11> 소프라노 신영옥씨
당시 콩쿠르 본선 진출자 4명 중 고등학생은 나 하나밖에 없었다. 내 입으로 얘기하려니 쑥스럽긴 하지만 리틀엔젤스 예술단 활동을 하면서 많은 무대에서 솔로로 노래를 불렀고, TV에도 나올 정도로 촉망받는 학생이었다. 학교에서도 전액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선생님들과 부모님의 기대가 컸다. 당연히 나도 내가 1등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아음악콩쿠르 마지막 날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중 로지나의 아리아와 가곡 ‘못 잊어’를 불렀다. 고등학생이 콩쿠르에서 가곡을 부르는 일은 드문 일이어서 주위 사람들이 놀라워했던 기억이 난다. 결과는 3등이었다.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1, 2위를 차지했다. 그럴 만했다. 콩쿠르를 앞두고 목감기가 심하게 걸려 병원을 자주 갔다. 림프샘이 부어 노래를 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지금도 콩쿠르에 대한 기억보다는 병원에 자주 다녔던 기억만 난다. 그래도 고등학생으로서 콩쿠르 입상은 대단한 화제였다.
동아일보와의 인연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유학을 떠난 뒤 미국 유럽 등 여러 나라에서 무대에 서며 이름을 알렸다. 그렇게 10년 넘게 활동했지만 한국 무대에는 오르지 못했다. 어머니는 “아무리 해외에서 열심히 활동해도 한국 무대에 서야지 사람들이 알아준다. 그리고 내가 살아있을 때 너의 무대를 직접 보고 싶다”며 자주 전화를 했다. 당시 어머니가 간암으로 투병 중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다섯 살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활짝 웃고 있는 신영옥. 성악과 무용을 놓고 고민할 때 어머니의 권유로 성악을 선택한 그는 공연 때문에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해 어머니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안고 있다. 그는 1992년 동아일보 주최로 열린 국내 첫 독창회 포스터(작은 사진)를 간직하고 있다. 신영옥 씨 제공
1992년 3월 9일 오후 7시 반 서울 예술의전당. 아직도 시간과 장소가 선명하게 기억난다. 지금도 내 방에는 당시 독창회 포스터가 20년 넘게 걸려 있다. 그만큼 내게 소중하고 특별했던 공연이다. 한 방송사에서 그날 독창회를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어머니가 무대 뒤에서 바라보는 모습과 내 머리를 만져주는 모습 등이 찍혔다. 독창회는 꽤 성공적이었다. 한국에서 인지도도 많이 높아지고, 여러 학교에서 교수직을 제안해왔다. 그 뒤 동아일보와 함께 1993년, 1995년, 1998년에도 독창회와 오페라를 함께 했다. 너무나 고마운 마음에 2년 넘게 동아꿈나무 장학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첫 국내 독창회 다음 해인 1993년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본 딸의 마지막 공연이 동아일보 주최 독창회가 됐다. 지금도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을 지날 때마다 어머니와의 옛 추억이 떠올라 눈물이 날 때가 많다. 동아일보는 성악가로서 나의 장래성을 알아봐줬고, 한국에 내 이름을 알리게 해줬다. 그리고 어머니가 기억하시는 마지막 공연도 함께 했다.
소프라노 신영옥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