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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남북 궁합론

입력 | 2018-01-11 03:00:00


남북 장관급 회담이 11년 만에 다시 열려 새로운 남북관계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9일 남북 고위급 회담 전체회의 시작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는 조명균 통일부 장관(오른쪽)과 리선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판문점=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주성하 기자

남북 관계엔 ‘궁합’이라는 게 분명 존재한다. 한쪽이 원한다고 해서 서로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미국이란 ‘시어머니’도 큰 변수가 된다.

셋의 궁합이 가장 좋았던 시기는 2000년이었다. 5년 넘은 ‘고난의 행군’으로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하고 경제가 완전히 파탄 난 김정일에겐 돈이 절실히 필요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결과적으로 노벨 평화상을 안겨준 햇볕정책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르윈스키 스캔들에서 막 빠져나온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겐 확실한 대외관계 업적이 필요했다.

이 셋의 조합이 만들어낸 결과가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이었다. 누구 하나라도 원치 않았다면 정상회담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의 ‘긍정적 궁합’은 8년간 이어졌다.

그러나 한결같이 좋은 운세란 없다. 2008년은 남북 관계가 ‘부정적 궁합’으로 돌변한 해이다. 막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보수 지지층을 의식해 대북 지원을 하려 하지 않았다. 미국엔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지목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있었다.

남북관계가 어그러진 상징적 사건이 바로 2008년 7월 금강산 박왕자 씨 피살사건이었다. 금강산 관광을 ‘현금 퍼주기’의 상징으로 본 이명박 정부는 기다렸단 듯이 금강산 전면 철수를 단행했다. 김정일은 8월 초만 해도 현정은 현대아산 회장을 만나 피살 사건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등 사태를 수습하려 노력했다. 햇볕정책 시기라면 이 정도 노력이면 무난히 풀 수 있었다.

이때 결정적 사건이 발생했다. 8월 중순 김정일이 뇌중풍으로 쓰러진 것이다. 약 한 달 뒤 회복한 김정일의 태도는 확 바뀌었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김정일은 “지금은 외부에 문을 열 때가 아니라 문을 꽉 닫아걸고, 내부에서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줘야 할 때”라고 판단한 듯싶다. 이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3년 동안 김정일이 오로지 집착했던 일은 아들 김정은에게 권력을 물려주는 것뿐이었다.

결국 어느 한쪽도 원치 않았으니 남북관계는 파탄 날 수밖에 없다. 북한이 문을 닫아거는 수법은 간단하다. 도발을 하면 외부에서 알아서 ‘제재’라는 빗장을 꽉 걸어준다.

김정은도 집권 초기 외부 교류에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몽둥이를 휘둘러 확실하게 내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누가 엿보지도, 참견도 못 하게 집안 문을 꽉 닫아 매는 것이 필요했다. 또 어차피 남의 참견 상관없이 문을 닫은 김에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란 비싼 ‘금단의 재산’도 빨리 장만하자는 게 김정은의 속셈이었다. 그렇게 2008년에 시작된 부정적 궁합은 이렇게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하지만 올해는 부정적 궁합이 다시 긍정으로 바뀌는 때가 온 듯하다. 9일 열린 남북 고위급 회담은 어쩌면 전환점일 수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남북관계 개선 의지는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김정은에게도 이제는 문을 열고 나와야 할 절실한 필요가 생겼다. 지난 6년간 대량 숙청으로 권력도 확실히 장악한 데다, 지난해 말엔 수소탄과 미국까지 가는 ICBM을 가졌다고 주장하며 ‘국가 핵무력 완성’까지 선언했다.

이제 김정은의 당면 과제는 민심 달래기이다. 핵무력만 완성하면 이른 시일 내에 잘살 수 있다는 선전을 믿고 허리띠를 조이며 살아온 인민에게 희망이라도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현 상황은 완전히 반대다. 지금 중국과 해외에 파견됐던 외화벌이 일꾼들이 줄줄이 돌아오면서 북한 내부에선 “이젠 중국까지 등 돌렸으니 우린 다 죽게 생겼다”는 불안감이 팽배해지고 있다. 실제로 중국이 대북제재에 적극적으로 합세하면서 최근 북한 장마당 내 식량과 휘발유 등의 가격이 크게 오르고 있다. 여기에 피복 임가공, 해산물 수출 등이 막히면서 돈줄도 말라가고 있다. 올해 봄쯤이면 북한 내부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터져 나올 판이다. 그러면 “이렇게 굶어 죽으려고 핵을 만들었느냐”는 불만의 화살이 김정은에게 향할 것이 뻔하다. 김정은은 하루속히 인민에게 곧 잘살게 될 것이란 희망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현재 유일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것이 남북관계다. 남한과의 급진적인 교류 재개를 보여주며 “봐라. 고생을 견디며 핵무력을 완성하니 남조선이 저렇게 황급히 머리 숙이고 들어오지 않냐. 더 참으면 미국과 일본도 다 우리에게 굴복하게 돼 있다”고 선전해야 한다. 그래야 민심을 수습할 수 있다.

회담을 하더라도 상대를 꿰뚫어 보며 마주 앉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래야 최대한 적게 주고, 더 많이 얻을 수 있다. 궁합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연애를 하다 보면 더 많이 좋아하고, 더 간절한 쪽이 늘 먼저 양보하는 법이다. 마찬가지다. 남북이 다시 마주 앉더라도 이건 분명히 알아야 한다. 지금 더 간절한 쪽은 북한이지 우리가 아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