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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시장-정책지원 3박자… ‘차이나 스피드’로 벤처 키운다

입력 | 2018-01-12 03:00:00

[CES 美 국제가전전시회 2018/약진하는 중국벤처 ㉻]거침없는 미래선점 전략




9일(현지 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막한 ‘CES 2018’의 주요 홀을 장식한 중국 업체들. 화웨이(위쪽 사진)는 자체 가상현실(VR) 기기 체험 부스를 전시장 초입에 배치해 관람객들의 이목을 끌었다. TV 업체인 TCL은 구글의 인공지능(AI) 플랫폼인 ‘구글 어시스턴트’를 탑재한 AI TV를 전시했다. 라스베이거스=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세계 최대 정보기술(IT)·가전전시회 ‘CES 2018’ 개막 이틀째인 10일(현지 시간) 오전. 미국 라스베이거스 베니션호텔에서 ‘5세대(5G)가 어떻게 미래를 가능하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기조연설이 열렸다. 치루(齊魯) 바이두(百度) 부회장 겸 최고운영책임자(COO)가 무대에 등장하자 기조연설장 좌석을 가득 메운 중국 업계 관계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수수한 캐주얼 차림으로 등장한 치 부회장은 바이두를 소개해 달라는 사회자의 말에 “중국의 구글”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바이두는 중국의 가장 큰 전자상거래 업체로서 인공지능(AI)을 토대로 상거래의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자신감 있게 말했다.

치 부회장은 이번 CES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인물 중 하나다. 그는 8일 바이두 프레스 콘퍼런스에서 ‘차이나 스피드’를 선언했다. 그는 “중국은 AI 산업이 꽃필 수 있는 기술과 자본, 시장, 정부의 지원 정책을 모두 가지고 있다. 바이두의 자율주행 기술 플랫폼인 ‘아폴로’가 ‘차이나 스피드’로 혁신을 주도하는 사례”라고 말했다.

‘차이나 벤처’가 빠른 속도로 CES를 장악한 것은 지난해부터였다. 주최 측인 CTA에 따르면 지난해 CES에 참가한 중국 업체는 1300여 개로,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이는 CES 2016 때의 참여 업체 수 대비 20%가 증가한 수치다. 특히 드론, 스마트홈, 웨어러블 기기 등의 분야에서 미국에 버금가는 수의 기업들이 부스를 차지했다.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 독일 등을 숫자로 압도했다. 2015년부터 CES에 참석한 국내 드론업체 유비파이의 임현 대표는 “지난해부터 드론관의 대부분은 중국 스타트업들이 차지했다. 중국은 신산업 관련 스타트업의 투자 유치가 쉽고 정부 지원이 활발하기 때문에 업체수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치 부회장이 말한 ‘차이나 스피드’가 CES 현장에서 이미 확인된 것이다.

중국은 막강한 ‘차이나 머니’와 거대 시장을 바탕으로 거침없이 ‘차이나 벤처’를 키워왔다. AI, 자율주행차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선 인재를 쓸어 담았다. 이날 기조연설 무대에 오른 치 부회장도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와 야후에서 이름을 날린 AI 전문가로 지난해 1월 바이두로 스카우트되며 업계의 화제가 됐다. 바이두는 치 부회장에 앞서 2014년 앤드루 응 스탠퍼드대 컴퓨터공학 교수를 영입하기도 했다. 응 박사는 지난해 초 바이두를 떠났다. 알리바바도 MS와 구글 출신의 AI 전문가를 AI랩스에 합류시켰다.

바이두는 AI 인재 영입에 힘입어 자체 AI 운영체제(OS)인 ‘듀어(DUER)’를 개발해 공개했다. 듀어 OS가 적용된 스마트 스피커, 휴대전화, 레이저 프로젝터는 음성을 인식해 전원 및 조명, 온도 등을 조절할 수 있다. 듀어 OS는 올해 화웨이나 샤오미 등 중국 업체가 만드는 여러 모바일 기기 등에 적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세계 최대 인터넷 상거래 회사인 알리바바도 CES에서 자체 AI 플랫폼인 ‘이티 브레인(ET BRAIN)’을 적극 홍보했다. 알리바바는 중국 정부 지원 아래 ‘AI 스마트 도시 건설’ 개발 프로젝트를 맡아 2016년부터 항저우(杭州)에서 교통 정보 및 범죄 분석 등 각종 도시 데이터를 이티 브레인으로 분석하는 스마트 도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CES 현장을 지켜본 국내 소프트웨어(SW)업계 관계자는 “바이두나 알리바바를 중국 내수 기업으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라고 했다. 이미 회사 역량이 글로벌 업체인 구글과 아마존을 능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분석이다. 다른 SW업계 관계자는 바이두와 알리바바가 급속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활동하던 중국인 인재들의 대거 귀환을 꼽았다. 그는 “알리바바가 출범할 때 구글 출신 중국계 SW 전문가들이 대거 옮겨 갔다”며 “치루 바이두 부회장이 MS에서 고향으로 돌아갔듯 중국 출신 인재들이 고향에서 성장 가능성을 재발견하고 비전을 찾아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중국은 2010년부터 2016년까지 1000개가 넘는 미국 초기 기술기업에 300억 달러(약 32조 원)를 투자하는 등 기술기업 쓸어 담기에 나서고 있다. 이는 미국 내 전체 에인절펀드의 약 10%에 해당된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국방부는 중국이 차이나 머니를 앞세워 기업 인수 형태로 AI, 자율주행차, 가상현실(VR) 등 첨단 기술을 빼가는 데 대해 사실상 군사 기술이 유출되는 것이라며 경고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집중 지원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중국은 최근 노벨상 수상자와 기업인 등에게 10년짜리 비자를 무료로 발급하고 체류 기간도 기존의 두 배로 늘리는 내용의 인재 영입 정책을 발표했다. 동시에 정부기관을 동원해 삼성전자의 반도체 가격 인상을 견제하고 자국 기업을 육성하는 등 반도체 굴기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최근 한국은행 분석에 따르면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지난해 1∼9월 인구 1만 명당 신설 기업 수는 중국이 32개로 한국(15개)의 2배가 넘었다. 신설 기업 수는 한국의 60배인 451만 개다. 하루 평균 1만6500개의 기업이 새로 탄생한 것이다. 2012년에는 한국이 1만 명당 15개로 중국 14개보다 많았으나 한국은 정체된 반면에 중국은 꾸준히 늘어난 결과다.

CES 현장에서 만난 중국 스타트업들도 정부 지원이 사업 정착에 큰 도움이 됐다고 입을 모았다. 수중촬영용 드론을 개발하는 중국 업체 ‘수블루(SUBLUE)’는 톈진(天津)에 터를 잡고 사업을 키워 온 스타트업이다. 수블루의 영업 매니저인 세라 수 씨는 “톈진은 임대료가 매우 비싼 편이지만 정부가 스타트업 입주를 지원하고 있어 수블루도 톈진에 사무실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라스베이거스=김재희 jetti@donga.com·김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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