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박종철 31주기… 그날의 흔적을 찾아서

잊혀져 가던 고 박종철 씨에 대한 기억이 영화 ‘1987’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모교인 서울대 중앙도서관 인근에 세워진 추모비와 흉상(왼쪽). 그가 하숙했던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조성돼 13일 선포식을 갖는 ‘박종철 거리’의 벽화. 기타 치는 박종철의 모습을 그렸다(가운데). 그가 물고문으로 사망한 남영동 대공분실의 509호실은 원래 모습을 복원해 보존하고 있다. 7층 건물 중 조사실 15개가 있는 5층의 정면 19개 창문은 조사 도중 투신 등을 방지하기 위해 작게 설계되어 있다. 구자룡 bonhong@donga.com·원대연 기자
세월 속에 모교에서는 기억 옅어져
11일 다시 찾은 언어학과 사무실. 31년의 시간이 지난 데다 2동 1층으로 옮긴 지 오래여서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중앙도서관 부근에는 1997년 6월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가 세운 추모비가 있다. 추모사를 적은 기념비와 약력 등을 적은 얼굴 동상 2개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념비 우측에는 서양사학과 84학번으로 1987년 9월 8일 군에서 의문사한 최우혁 씨 추모 조형물이 ‘우혁이를 사랑하는 벗들’에 의해 세워져 있다.
추모비 부근을 지나는 학생 2명에게 추모비에 대해 물었지만 “학교에 몇 명의 민주 열사 추모비가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박종철 열사 추모비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1980년대 경찰이 시위진압을 위해 최루탄을 쏘며 학교에 진입했을 때 추모비가 있는 곳도 최루 가스가 자욱한 곳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날의 함성과 고문치사 등에 대한 분노도 흐려지고 있었다. 동양사학과 10학번 석사과정의 한 남학생은 “취업난으로 학부 2학년 2학기만 돼도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등 정상적으로 전공 수업을 듣지 않는 학생도 적지 않다”며 “민주화 열사들은 오랫동안 잊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박종철 열사 추모비의 글씨도 흐릿해서 읽기가 쉽지 않았다. 2004년 5월에는 모교인 부산 혜광고에도 추모비가 세워졌다.
신림동 녹두거리에 조성된 ‘박종철 거리’

서울 관악구 신림동 녹두거리 인근에 조성된 ‘박종철 거리’에 표지판과 벽화 등이 설치되어 있다. 표지판 길 건너편의 하숙집은 없어지고 3층 원룸 주택이 들어섰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한 운동권 학생의 후일담이다. 당시 신림동은 서울대생들의 하숙집 천지였다. 방값이 없을 때는 친구 하숙집에 얹혀사는 경우도 많았다. 자고 일어나면 누가 붙들려갔다는 얘기가 횡행하던 시절이다. 서울대에 이어 신림동 녹두거리를 찾았다. 13일 그가 하숙을 했던 신림동에서 관악구청과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등이 주최하는 ‘박종철 거리’ 선포식이 열린다고 해서다.
‘박종철 거리’는 신림동 ‘녹두거리’에서 옆으로 난 대학로 5길 약 100m 거리에 조성됐다. 11일 찾아간 이곳에는 청계피복노조 관련 활동으로 1986년 4월 구속된 뒤 가족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과 약력을 담은 거리 안내 표지판, 얼굴을 새긴 동판이 설치됐다. 동판에는 ‘6월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대의 숭고한 희생 위에 새겨진 것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으로 사망 6·10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됨’ 등의 문구가 새겨졌다.
거리에 있는 ‘도덕 공원’ 옆 담장에는 그의 민주화 운동 당시 활동을 담은 벽화가 그려졌다. 학창 시절 기타 치며 노래하는 장면도 있다. 유종화 화백의 작품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졌을 때 그가 즐겨 불렀던 ‘그날이 오면’을 사람들과 함께 부르는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구청 관계자는 설명했다. 그가 하숙을 했던 집은 원룸 주택으로 바뀌었다.
‘경찰 인권센터로 변신한 고문 대공분실’
위치는 용산구 한강대로 71길 37. 주소명도 용산구 갈월동이지만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영역이 있어 ‘남영동 대공분실’로 불렸다. 과거 정식 명칭도 ‘경찰청 보안국 보안 3과 남영동 보안분실’이었다.
1976년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처음 설립된 이곳은 2005년 경찰 창설 60년을 맞아 ‘경찰청 인권센터’로 바뀌었다. 2008년 6월 10일부터 4층과 5층을 일반에 개방했다.
피의자들은 건물 뒤로 난 작은 뒷문을 지나 나선 계단으로 올라갔다. 기자가 철제 계단 71개를 밟고 올라가는데 계단의 삐걱거림이 밀폐된 원형의 좁은 공간에 울려 마치 고문실로 가는 것처럼 두렵고 오싹했다. 박종철기념사업회는 “나선형 계단을 오르면 방향 감각도 상실하고 차가운 쇳소리로 공포감은 더욱 극대화된다”고 안내 책자에서 적었다.
취조실이 있는 5층에는 1∼15 숫자가 문 위에 붙은 조사실과 번호가 안 붙은 조사실이 있었다. 과거에는 밖에서 전등을 끄고 켤 수 있으며 문마다 안을 감시할 수 있는 렌즈가 달려 있었고 취조실 안에는 욕조와 수세식 변기, 침대, 고정된 의자와 책상, 폐쇄회로(CC)TV도 갖추어져 있었다. 문을 열어도 앞방은 볼 수 없도록 설계됐다. 현재는 박종철 씨가 조사받은 509호실을 빼고는 리모델링으로 변기와 세면대 외에는 모두 치워졌다. 1985년 9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 의장이었던 김근태 씨도 515호실에서 23일간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다.
1층 ‘인권센터 역사관’에는 ‘우리를 위해 투쟁하신 민주열사들 고맙고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등 방문객들의 다양한 목소리들이 적힌 무궁화꽃 메모지가 벽 한곳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역사의 교훈으로 항온 항습 보존되는 509호실
4층에는 ‘박종철 기념 전시실’과 ‘인권 교육 전시관’을 마련했다. 전시실에는 어린 시절의 사진, 박종철 열사가 사용했던 기타, 옥중에서 가족에게 보낸 편지, 언어학과 동료들의 집단 창작시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 영등포교도소에 수감 중 고문 경관 축소 내용을 폭로한 이부영 씨(전 국회의원)의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다.
경찰은 당시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고문 가담 경찰은 2명뿐이었다’ 등 은폐 조작을 거듭했으나 최초로 사체를 검안한 중앙대 용산병원 내과 의사 오연상 씨, 언론, 민주화 운동가, 양심적인 교도소 근무자,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등의 헌신과 폭로로 ‘고문 치사 및 축소 은폐’의 전모가 드러났다.
전시관 방명록에는 ‘박종철 님과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시민들의 희생이 있어 오늘날 작은 민주화를 이루었다. 이제 시작이다’ ‘87년 7월에 태어난 이가 그날을 생각합니다. 아직 숙제가 많이 남아 있으매 다시 한번 무겁게 고개를 떨굽니다’라는 글귀 등이 눈에 띄었다.
서울역 부근 제약회사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이곳을 찾은 박민석 씨(35)는 “비좁은 방에서 온갖 고통을 겪었던 박종철 열사를 생각하니 절로 숙연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인권센터가 개방됐지만 신분증을 맡기고 방문신청서에 개인정보 사용 동의를 하는 것이 찜찜하고 아직 권위주의적이라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센터 측은 ‘청사 보안사고 예방 등’ 목적으로 개인 정보 수집 이용에 관한 동의서를 받는다고 밝혔다.
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김예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