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 기민-사민-기사당 극적 합의
당시 독일은 11%의 높은 실업률과 재정적자 350억 유로의 경제 불황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메르켈 총리는 사민당과 협상을 통해 △노동시장 유연화 △부가세 인상 △사회보장 축소 △재정적자 감축 등 4가지 핵심 사안에 합의했다.
보수당인 기민당은 당시 근로자의 해고를 쉽게 하고, 고령화로 인한 연금 재정 악화를 막기 위해 연금자가부담률과 은퇴 연령을 높여 재정 지출을 줄이는 데 주력했다. 사민당은 노동시장 유연화에 합의해주는 대신 연봉 25만 유로 이상 소득자에게 부과하는 부유세를 인상했다.
12일 기민당을 이끄는 메르켈 총리는 제1야당인 사민당, 자매당인 기독사회당과 함께 집권 후 세 번째 대연정에 합의했다. 여당과 제1야당이 함께 국정을 운영하는 대연정은 ‘협치’의 대명사로 꼽힌다. 메르켈 총리는 집권 16년 동안 12년을 대연정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총선 이후 자유민주당, 녹색당과의 연정 시도에 실패한 뒤 총리직까지 위협받았던 메르켈 총리는 4선 연임에 사실상 성공했다.
대연정의 가장 큰 장점은 보수당과 사민당 단독 정부 때 나올 수 있는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정책보다 합의 가능한 중도로 정책이 수렴되고, 여야가 함께 국정을 운영해 정치가 안정된다는 데 있다.
12일 세 번째 연정 합의 역시 기민당과 사민당, 기사당의 의견이 종합적으로 반영됐다. 기민당은 소득세의 최고세율을 높여 부자에게 돈을 더 걷자는 사민당의 요구에 맞서 누구에게도 증세는 없다는 원칙을 지켜냈다. 사민당은 향후 4년 동안 1000억 유로의 정부 소비를 늘리자고 했지만 기민당은 그 금액을 460억 유로로 막아내 균형예산이 가능해졌다.
보수 성향으로 난민에 엄격한 기사당은 매년 난민 수용 상한선 22만 명을 정해두고, 해외에 거주하는 난민 가족도 1000명 이상 못 들어오도록 했다.
대연정은 합의 전까지는 진통이 있지만 합의 후에는 틀에 맞춰 일사천리로 국정 운영이 이뤄지는 장점이 있다. 2013년 대연정 합의 당시 추진 과제로 ‘인더스트리 4.0 미래 전략’이 포함됐고, 이후 법도 예산도 순조롭게 통과되면서 독일이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선두주자가 되는 데 일조했다. 기민당과 사민당은 이번에도 2025년까지 독일 전역에 ‘기가바이트 네트워크’가 이뤄지도록 5세대(5G)를 비롯한 디지털 인프라에 대거 투자하기로 합의했다. 양당은 또 에너지와 관련해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율을 65%까지 끌어올리기로 합의했다.
이처럼 연정 합의안은 많은 진통을 겪더라도 도출되기만 하면, 그 후 정책은 예측 가능해지고 실행력 있게 진행된다. 원전 문제를 비롯해 노동개혁, 공무원연금 개혁, 최저임금 등 주요 개혁 정책마다 여야 갈등으로 표류하거나 용두사미로 끝나는 한국과 대조되는 대목이다.
○ ‘대연정의 약발이 예전 같지 않다’는 우려도 높아
무엇보다 대연정의 최대 장점인 대표성에 금이 가고 있다. 전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는 기존 정치에 대한 불신에 따른 양당 정치의 퇴조 현상으로 기민당과 사민당의 지난해 9월 총선 득표율은 53.5%로 과반 의석을 간신히 넘는 수준이었다. 두 당의 합이 70%에 육박했던 2005년(69.5%)과 2013년(67.2%) 때와 비교하면 ‘대연정’ 이름이 무색할 지경.
독일 대연정이 합의에 치중하면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기보다 지나치게 안정 위주로 흘렀고, 이에 싫증을 느낀 유권자들이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을 비롯한 극단주의로 향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독일 언론 슈피겔은 대연정을 ‘구석기 연합’이라고 불렀다.
대연정 이후 기민당과 사민당 모두 성적이 신통치 않아 당내 부정적인 내부 여론도 커지고 있다. 2005년 대연정 이후 치러진 2009년 총선에서 23% 득표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참패를 기록한 사민당은 2013년 대연정 이후 지난해 총선에서 20.5%로 최악의 기록을 다시 세웠다. 기민-기사 연합도 2005년과 2013년 대연정 직후 총선에서 각각 33.8%와 33%로 역시 2차 대전 이후 가장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자 기민당 내부에서는 메르켈 총리가 권력 유지를 위해 과도하게 좌파 정책을 수용했다는 비판이, 사민당 내부에서는 또 들러리만 섰다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사민당 지도부가 타결 직후 당내 설득 작업에 나섰지만 작센안할트주 사민당은 반대 입장을 정했고 헤센주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청년조직 등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어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12일 연정에 합의한 후 메르켈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이번 연정 합의가 향후 10년이든 15년이든 독일의 지속적인 안정과 번영을 보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장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47%는 메르켈 총리가 임기 2021년을 채우지 말아야 한다고 밝혔다. 메르켈 총리와 그의 대연정 앞에 험난한 길이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 / 위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