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떴다 안창남” 한국인 첫 비행행사 열어 인촌선생, 안창남에 자택 내주기도… 1927년 ‘동아상’에 과학부문 시상
조선의 천재 비행사 안창남(위)의 고국 방문 소식을 알린 1922년 12월 7일자 3면 동아일보 기사. 동아일보DB
1922년 12월 10일 비행사 안창남(1901∼1930)은 동아일보사와 ‘안창남 고국방문비행후원회’ 공동 명의로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전단을 서울 시내 상공에 뿌렸다. 이날은 한국인이 최초로 우리나라 영공(領空)을 비행한 날로 역사에 기록된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은 드넓은 하늘마저 뺏겼다. 한반도 하늘을 최초로 비행한 인물은 일본 해군 중위 나라하라 산지(奈良原三次)였다. 1913년 8월 29일, 경술국치 3주년에 맞춰 일본의 기계문명을 과시하는 무력시위를 벌인 것.
이후 동아일보는 1922년 10월 29일 ‘안창남 고국방문비행후원회’를 조직하고 사무소를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에 두었다. 그해 11월 22일자 사설에서 “안창남군의 1회 비행이 우리의 모든 생활을 개혁 발전한다는 것은 아니나 간접으로 자중자신할 기회를 작(作)할 것은 확실한 사실”이라며 과학 부흥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안창남은 서울에 체류하는 기간 내내 인촌 김성수 선생의 자택에 머물렀다.
1922년 12월 10일 금강호를 탄 안창남은 5만여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했다. 남산과 창덕궁 등 서울 시내를 한 바퀴 돈 뒤 3회에 걸쳐 고등비행의 묘기를 선보였다. 동아일보는 다음 날인 12월 11일자 3면을 안창남의 비행 기사와 화보로 채우는 특집 면으로 발행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안창남 고국비행 행사를 개최하기 위해 6800원을 지출했지만 수입은 600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망설이지 않고 6200원의 손실을 떠안았다. 일제의 압제로 열패감에 빠져 있던 조선 청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가져다줄 거족적 행사로 여겼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1927년 제정한 동아상에서 매년 과학상 부문을 시상해 과학 중흥을 위해 노력해왔다. 1936년 1월 5일 “발명조선의 귀중한 수확”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는 25년 동안 특허국에 등록된 조선인의 발명품 202점을 모두 기록해 알렸고, 1937년 12월 7일에는 “발명조선의 대기염, 특허신안출원에 등록한 조선인이 반수 이상”이라는 기사를 실으며 민족의 우수성을 부각하는 데 앞장섰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