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끝> 윤동주 묘지
윤동주 묘비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윤동주의 동생 윤광주 윤혜원(왼쪽 사진 왼쪽에서 2, 3번째)과 친척들. 김응교 교수 제공
윤동주 묘비 측면을 보면 매장은 1945년 3월 6일 했고, 6월 14일 묘비석을 세웠다고 쓰여 있다. 그를 매장한 다음 날인 3월 7일 마치 동생의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떠나듯 송몽규가 사망했다. 이후 가족들이 대부분 조국으로 돌아오고 명동마을을 떠나면서 저 묘는 잊혀졌다.
1985년 5월 와세다대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교수가 찾아오기 전까지 묘지는 바람과 새떼와 양떼가 노니는 동산이었다. 오무라 교수는 동생 윤일주 교수가 준, 묘비 앞에서 가족 다섯 명이 찍은 사진을 들고 연변대 팀과 함께 헤매다가 사진에 있는 비석을 찾았다.
나는 1993년 윤동주 생가를 처음 방문하고 나서 명동마을에는 몇 번 갔으나, 윤동주 묘지에는 2010년 7월 여름에야 처음 갔다. 길이랄 것도 없었다. 묘지 사이를 걸었다. 온통 발이 푹푹 빠지는 시답잖은 늪지를 옌볜의 문학평론가 최삼룡 선생님께서 앞에서 안내해 주셨다. 날씨가 덥지 않으면 갈 수 없다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날씨가 더워야 늪지가 굳기 때문에, 가슴에 덮으면 금방 땀으로 젖는 수건을 몇 번이나 쥐어짜면서 묘지를 찾아갔다. 능선을 두 개 정도 넘고 나서 윤동주 묘지가 나타났다. 선인들의 삶을 생각하라고 묘지 가는 길은 한두 번 일부러 휘게 만들었다던데, 윤동주 묘지 찾아가는 길은 그의 삶을 회고하게 했다.
묘지 앞에 엎드려 묵념하기 힘들 정도로 개미가 많았다. 헐벗은 봉분은 듬성듬성 파인 개미굴로 허물어져 있었다. 그가 살아온 수난의 상징일까. 묘지 주변은 매일 양떼가 풀을 뜯어 먹는 양떼의 식탁이었다.
중국 룽징시에 있는 윤동주 묘는 오랫동안 방치되다가 최근 들어 중국 정부의 관리를 받기 시작했다. 김응교 교수 제공
찬찬히 묘비를 보니 연도가 모두 서기(西紀)로 쓰여 있다. 묘비문 끝에도 ‘1945년 6월 14일 근수(謹竪)’라 새겨져 있다. 송몽규나 현석칠 목사 묘비에는 일본이 세운 만주국 연호가 쓰여 있다. 윤동주 묘비는 만주국 연호가 아니라 서기다. 부친의 친구이며 명동학교 학감으로 윤동주의 스승이었던 김석관(金錫觀) 선생이 비문을 짓고 썼다. 일본 감옥에서 죽은 제자의 삶을 기려 만주국 연호를 쓰지 않은 스승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신기하게도 윤동주가 살아 있을 때 이곳에 찾아오지 않았을까 싶은 시가 한 편 있다.
흐르는 달의 흰 물결을 밀쳐
여윈 나무 그림자를 밟으며,
북망산을 향한 발걸음은 무거웁고
고독을 반려(伴侶)한 마음은 슬프기도 하다
누가 있어만 싶던 묘지엔 아무도 없고,
정적만이 군데군데 흰 물결에 폭 젖었다
‘흐르는 달’이란 서쪽으로 밀려가는 밤하늘을 보여준다. ‘여윈 나무’란 잎사귀가 다 떨어져나간 겨울을 지명한다. 윤동주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 어두운 밤에 시린 겨울 시대는 얼마나 암담한가. 북망산은 무덤이 많은 공동묘지를 말한다. 북망산을 생각하며 사는 삶은 늘 ‘무거웁’다. 산문 ‘달을 쏘다’(1938년)에서 보듯 그는 어두운 밤의 숲을 산책하며 ‘고독한 반려’를 연습했다. 모리스 블랑쇼에 따르면 문학의 공간은 황폐한 죽음의 공간이 아니던가. 흰 물결 치는 달빛 아래 마른 나무 숲길을 따라 북망산으로 간다. 고독과 동행하는 마음은 서럽다. 묘지에는 아무도 없고 괴이한 정적만 달빛의 흰 물결에 폭 젖어 있다.
오죽 답답하면, 무엇을 바라 겨울 달밤에 묘지를 찾아갔을까. 답은 ‘누가 있어만 싶던’이라는 표현이다. 대체 묘지에 누가 있기에. 그것은 어떤 정신이다. ‘죽음에 승리자 위인(偉人)들!’(‘삶과 죽음’)이라 했던 바로 그 승리자들, 승리자들의 정신을 만나러 이곳에 오지 않았을까. 동산교회 묘지 터엔 마치 부활을 기다리듯 십자가가 그려진 비석이 많다.
윤동주 탄생 100주년 아침, 나는 ‘죽음에 승리자’인 윤동주와 송몽규와 많은 애국지사를 만나러 왔다. 이들은 죽어서 살리는 죽음을 아찔하게 가르친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