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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박훈상]‘들개’가 되겠다는 제1야당 원내대표

입력 | 2018-01-19 03:00:00


박훈상 정치부 기자

들개는 지난해 12월 14일 여의도에 등장했다. “거센 모래벌판 엄동설한에 내버려진 들개처럼 문재인 정권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다”는 외침과 함께였다. 예상하지 못한 들개의 출현에 그의 말을 노트북으로 받아치던 일부 기자들은 ‘들꽃’이라고 쳤다. 들개라고 똑똑히 들었지만 귀를 의심했다. 여의도에서 자신을 들개라 칭한 정치인이 있었는가.

들개는 애드리브였다. ‘58년 개띠’인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는 취임 첫 당 원내대책회의에서 준비된 원고에도 없던 들개를 즉석에서 떠올렸다. 그는 사석에서 “1980년대 초 중동에서 일할 때 밤이면 들개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부를 향한 투쟁의 각오를 밝히는 순간 모래벌판에서 처절한 생존 투쟁을 벌이던 들개 떼가 떠올랐다”고 했다.

대여 투쟁을 주도하는 제1야당 원내 사령탑이 들개를 자처하자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는 그의 목소리가 당에서 공감을 얻기 시작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한국당 패싱’ 전략 앞에 한국당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때였다. 김 원내대표는 민주당 우원식 원내대표를 만나 “대여 투쟁력이 결여된 야당은 존재 가치가 없다. 대여 투쟁력을 제대로 갖춰 협상에 임하겠다”고 경고했다.

들개는 한 달간 숨 가쁘게 달렸다. 김 원내대표는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의 아랍에미리트(UAE) 방문 의혹을 주도했다. 원전에서 비밀 군사협정으로 의혹의 핵심이 옮겨가면서 말을 바꾼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12일 국회를 찾아온 임 실장에게 “제1야당인 한국당에 더 잘 설명하고, 협력을 구하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대통령비서실장이 야당 대표를 단독 면담하는 일 자체가 이례적이다.

하지만 서울 광화문에 나타난 김 원내대표는 목소리 크기만 키웠을 뿐 국민을 설득할 메시지를 내놓지 못했다. 15일 김 원내대표는 동료 의원들과 함께 광화문광장에서 ‘문재인 관제 개헌 저지 및 국민개헌 선포’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는 ‘국민 개헌 선포문’을 낭독했다. “문재인 관제 개헌을 반드시 막아내겠다”고 외쳤다.

김 원내대표가 읽은 원고지 6장 분량의 선포문 안에는 한국당이 구상한 개헌안이 없었다. 싸우자는 결의는 선명하지만 이렇게 만들겠다는 구상은 흐릿했다. 새로운 체제에 대한 청사진이 없으니 ‘6월 개헌 반대, 연내 개헌’이란 주장은 반대를 위한 반대로만 들렸다. 한국당은 정부·여당을 향해 ‘좌파사회주의 개헌안’이라고 비판적 공세를 퍼붓기에 앞서 보수의 가치를 담은 개헌안부터 제시해야 한다.

같은 시각 여의도에 남은 한국당 관계자는 김 원내대표를 향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 그는 “당이 개헌 전략을 잘못 잡았다. 관제개헌 대 국민개헌 프레임을 짜려고 하는데, 우리 당 생각도 없이 국민만 끌어다 놨다”고 했다.

김 원내대표는 사막 모래벌판에서 살아남은 들개의 힘을 생명력, 야생성 그리고 지혜라고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거론하며 현 정권을 향해 ‘대한민국의 근간이 흔들린다’고 비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변인의 입을 빌려 ‘분노한다’고 반박해 정국에 전운이 짙어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들개처럼 피가 끓겠지만 더 냉정하게 국가의 미래를 고민해야 할 때다. “들개는 당장 배가 고파도 행동에 옮기기 전에 상황을 명확히 파악한다.” 그가 들려줬던 들개의 지혜를 잊지 않았으면 한다.
 
박훈상 정치부 기자 tigermas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