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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의 이 한줄]참을 수 없는 ‘용서’의 가벼움

입력 | 2018-01-22 03:00:00


《 할머니, 용서가 뭐야? 없던 일로 하자는 거야? 아님, 잊어달라는 거야? 찬성이 채근하자 할머니는 강마른 손가락으로 담뱃재를 바닥에 톡톡 털며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그냥 한번 봐달라는 거야.―바깥은 여름(김애란·문학동네·2017년) 》
 
열 살 노찬성의 아버지는 보험금을 노리고 고의로 사고를 냈다. 들통이 나는 바람에 돈은 한 푼도 남기지 못했다.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는 집 근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분식을 팔며 두 사람의 생계를 꾸역꾸역 해결했다. 어느 날 노찬성은 주인에게 버려져 휴게소 한편에 묶여 있던 흰 개를 데려와 ‘에반’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천덕꾸러기처럼 남겨진 둘은 영원히 서로의 곁에 머무르며 외로움을 채워줄 것 같았다.

그러나 에반은 이미 나이가 많았고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려 있었다. 노찬성은 개의 안락사를 위해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11만4000원을 모았다. 하지만 돈이 생기자 노찬성은 휴대전화를 개통하고 핫바를 사 먹었다. 에반의 고통과 맞바꾼 돈을 다시 채우려면 사흘이 걸릴 텐데, 에반이 그 정도는 기다려주지 않을까. 어쩌면 에반이 다시 건강해지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자기합리화도 해 본다. 개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구슬피 울기 시작하다가 고속도로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제야 노찬성은 할머니가 알려준 ‘용서’라는 말을 떠올린다. 그러나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다.

어린 노찬성이 깨달은 것처럼 ‘용서’라는 말은 ‘없던 일이 될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는 일’을 저지른 사람이 먼저 꺼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요즘은 이 말이 참 가볍게 쓰인다. 여덟 살 아이를 잔인하게 성폭행한 조두순, 중학생 딸의 친구를 살해한 이영학과 그 외에 수많은 자격 없는 사람들이 ‘내가 이만큼 노력하고 있으니 한 번 봐 달라’며 너무 쉽게 용서를 구한다.

조두순은 2년 뒤 출소한다. 정작 피해를 입은 ‘나영이’는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우리의 법은 ‘주취감경제도’를 들어 술에 취해 저지른 일이라며 그를 용서했다. 많은 국민이 공분하고 있지만 음주감경폐지법은 여전히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계류 중이다. 결정이 늦어지는 동안 경남 창원에서는 50대 회사원이 유치원생을 성폭행한 후 술에 취해 있었다고 변명하는 일이 또다시 일어났다. 용서는 그렇게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용서’의 무게를 모두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손가인 기자 gain@donga.com